• 해외 취업자에서 해외 창업자가 되기까지 나의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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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도 성공 해외취업 수기를 전합니다. 지면 관계상 실제 수기 내용을 조금 각색하여 전합니다.

 

대학 시절 나의 목표는 단 하나, 해외취업

아랍어과를 졸업한 내가 어쩌다 체코까지 오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경험을 넓히는 것을 꿈꿨다. 외국어를 전공하고 전공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유학도 했다. 용감하게 떠난 첫 유학은 내가 꿈꾸던 삶에 확신을 주었다.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다양한 언어로 의견을 주고받고 각자의 꿈과 생각을 나누는 일은 신선한 충격과 넓은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젊은 시절 경험을 쌓고 싶은 곳이 한국이 아닌 타지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내 대학생활의 기준은 간결해졌다. 첫째, 관심 있는 국가와 관련 문화, 언어 교양 수업을 이수할 것. 둘째, 전공 언어 구사에 집중할 것. 전공으로 아랍어를, 교양으로 스페인과 남미 역사, 언어 수업을 선택하며 배움의 갈증을 해소했고 이 모든 배움은 지금의 직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생애 첫 직장 생활을 터키에서 시작하다

졸업 후 1년의 갭이어를 갖고 2015년 2월 이스탄불에 있는 한국 여행자 대상 지식 투어 회사에 입사했다. 아랍 국가에서의 유학 경험과 전공으로 들었던 문화 수업이 큰 도움이 되었다. 터키의 역사, 문화를 배우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적응 기간이랄 것도 없이 터키와 사랑에 빠졌다.

물론 일 자체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이 들었다. 한 도시에 대한 깊은 지식, 손님을 이끌고 걸으면서 하는 끊임없는 설명, 항상 긴장하고 살펴야 하는 주변 상황 등 ‘멀티태스킹’ 능력이 필요했다. 또 하루 10km 이상의 도보량까지. 퇴근 후엔 말 그대로 녹초가 되었지만, 누군가 이 도시를 사랑하는 데 일조하는 일은 큰 보람을 주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건강한 체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에서 활력과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지식 가이드에 도전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시간이 갈수록 내 직업과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애정은 커졌다. 만원 트램의 출근길, 파김치가 된 퇴근길에도 ‘행복해!’를 외칠 정도로 나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그러던 중 2016년 2월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이후 터키 방문 여행자가 급격히 줄면서 여행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내가 일하는 회사 역시 돌파구가 필요했다. 고심 끝에 선택한 곳은 바르셀로나였고 기초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내가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업무를 맡으니 어깨가 무거웠다.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투어를 만드는 일은 기존의 업무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도시 전체 지리를 익히고, 효율적인 동선을 찾고, 손님들에게 알려드릴 맛집을 찾아 골목을 헤집었다. 퉁퉁 부은 발로 집에 돌아와선 다시 각 관광지의 입장료와 입장 시간, 교통편 등을 외우다 잠들곤 했다.

 

반쪽짜리 해외 취업, 퇴사를 결심하다

스페인에서의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첫 투어를 시작하고 한 달 만에 60여 개가 넘는 바르셀로나 투어 판매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후기 5점 만점에 5점. 의심할 여지 없는 성공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나의 정체성이 된 직업과 아름다운 스페인의 생활이었지만 업무 환경에 미래가 없었다.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터키어 실력에 멀티태스킹을 필요로 하는 직업임에도 급여가 너무 낮았다. 또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스탄불의 사정까지 생각하면 근무 조건이 개선될 여지는 없어 보였다.


창업을 결정하고 펼쳐진 고생길,
그냥 피고용인으로 남을 걸 그랬나 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색했다. 긴 고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지식 가이드라는 내 직업을 너무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신중하게 조사를 시작했고 창업의 가능성이 높은 나라를 추려냈다.

첫째,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가이면서 둘째, 치안이 어느 정도 보장된 안전한 곳, 셋째, 저렴한 물가에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국가별 정책과 사업 등록 절차까지 검토하니 스페인과 체코가 남았다.

관광업이 포화 상태인 데다 창업과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스페인 대신 고유 화폐(코루나)가 있어 유로를 사용하는 국가에 비해 물가가 저렴하고, 그 당시 다른 국가만큼 경쟁이 치열하지 않으며, 저렴한 맥주와 돼지고기 요리가 한국인의 입맛에도 딱 맞는 체코로 결정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시작해보기로 했다. 70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이 있었다. 투어 장비, 체코 공부를 위한 책과 자료, 정착에 필요한 물품, 편도 항공권까지 470만 원을 썼다. 남은 돈은 생활비였다. 수입이 하나도 없을 때를 생각해 한국행 비행기 삯을 빼면 약 4개월가량 버틸 수 있는 돈이 남았다.

책과 자료,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체코를 공부했다. 기본 공부를 끝내고 나니 현지 지리를 익히고 동선을 짜는, 실제 투어를 만드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하기로 한 체코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책에서 배울 수 없던 현지 문화를 배웠고 숨은 맛집과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이야기를 지닌 장소를 찾아다녔다.

이때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투어 중개 사이트에 상품을 등록하고, 우리가 직접 만든 홈페이지도 열었다. 감사하게도 이전 나라들에서 가이드로 활동할 때 인연을 맺었던 손님들이 체코에 가는 지인들에게 홍보해주어서 예약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첫 두 달은 적자를 냈다.

몇 달이 지나고 후기가 쌓였다. 모든 후기가 5점 만점에 5점이었다. ‘내 회사’가 주는 책임감과 보람은 대단했고 수입이 적어도 하루하루 성취와 기쁨의 연속이었다.
 

쌀쌀맞은 체코에서 살아남기

다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도 있었다. 체코는 공기의 온도, 외부인을 대하는 눈빛과 말투까지 차갑다 못해 냉랭했다. 그래도 어느새 여름옷보다 많은 겨울옷이 내 옷장을 채웠고, 여전히 나의 체코어 실력은 유창하지 않지만 작게나마 이곳에 소속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체코 사람들의 성향을 학습한 이후로 그들의 행동과 말에 덜 상처받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지중해와 사막의 햇살에 잔뜩 올라갔던 나의 감정의 온도를 꼬박 만 3년 만에야 절반 이상 뚝 떨어뜨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체코는 내 집이 되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고, 하늘길이 막힌 현재 여행자들과 함께하던 나의 일이 아득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긴 어둠의 끝에서 비로소 빛을 볼 수 있기를, 다시 매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들을 만나기 위해 트램에 올라탈 내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힘을 낸다.

 

업데이트 2021-08-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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