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 창호에 부처의 마음을 담다, 삼라만상을 엮다
    대한민국 명장 대건목공소 임종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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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살에 목공예에 입문한 임종철 명장은 평생 창호를 통해 부처의 뜻을 전하고 어염집의 복을 기원해온 인물이다.
기술을 넘어 창호에 부처의 세상을 구현해온 그가 받은 ‘명장’이란 칭호는 어찌 보면 인간에게 속세에서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일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불심 가득한 창호를 위해 오늘도 쉼 없이 정진하는 임종철 명장을 만나러 광주시를 찾았다.
 


손재주 많았던 소년, 목공예의 길로 들어서다

명장의 삶이란 어쩌면 운명 혹은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전남 화순에서 가난한 집의 맏아들로 태어난 임종철 명장은 2년 가까이 호되게 앓았던 복막염 때문에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중학생이 된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 그가 고향에서 했던 일은 나름 부농이었던 외가에서 농사일을 거든 것이었다.
 

“외가가 작은 종갓집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꽤 컸어요. 덕분에 집에는 수리를 위한 대패, 톱, 망치 같은 도구들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도구들로 연, 썰매, 팽이, 토끼집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제게 손재주가 있다는 걸 알았지요.”
 

 

외할머니 역시 손주의 재간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깜빡 잊고 집에 놓고 온 농기구를 대신해 근처 숲에서 돌이나 나무를 찾아 그럴싸한 대체품을 만드는 능력을 봐왔던 덕분이었다

 

권유했다. 양복점, 모자, 구두, 나전칠기 등 기술은 많았지만, 임종철 명장이 목공을 선택한 이유는 제대로 배우면 고향에 돌아와 집도 짓고 집수리도 직접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순하고 성실했던 임 명장은 공방에서도 그 재주와 근면함을 금세 인정받았다. 기술을 배울수록 봉급이 올라갔기 때문에 남들이 잘 때도 일을 했고 한겨울 다 뚫린 공간에서 일하느라 발에 얼음이 서걱거렸을 때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친구들이 돈을 더 주는 곳으로 쉽게 이직했지만 그는 처음 일을 배웠던 김석봉 스승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남의 것은 어떤 경우에도 손대지 말아라. 새는 매년 둥지를 짓지만 새로운 곳에 짓지 않는다. 작년에 쓰던 둥지를 보수해서 수월하게 쓴다. 민달팽이처럼 허둥대며 사방 군데를 다니지 말아라. 집을 이고 사는 달팽이처럼 우직하게 굴어라’ 하셨지요.”
 

배움은 짧으셨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외할머니의 가르침은 임종철 명장이 평생 간직했던 재산이었다.
 

 

꽃살창호로 극락을 만나다

그가 오랜 문하생 생활을 끝내고 독립한 건 무려 7년 뒤, 1977년 7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운명처럼 절집 창호를 만나게 되었다.
 

“용화정사 대웅전에 가서 주문받은 가구와 장을 설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혼자 일하는 노(老) 목수를 외면하지 못하고 일을 도와주다가 박영곤 도편수를 만났습니다.”
 

서로의 솜씨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본 두 사람은 그 인연으로 함께 작업하게 됐다. 첫 번째 작업이 해인사의 보현암 장경각이었지만 야심 차게 시작한 이 작업은 결국 임 명장의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무의 특성과 절집을 잘 모른 채 일을 시작한 데서 범한 실수였다.
 

“우리는 남향을 선호하죠. 당시 아주 나이테가 곱고 세밀한 열대림 목재 ‘아카디스’로 문을 만들었는데 겨울에도 절집 처마 밑으로 햇빛이 계속 들어오면서 결국 문짝이 틀어져 버렸어요. 결국, 그 문짝을 전부 교체해 줬습니다. 목재를 애초에 잘못 선택한 거였지요.”
 

사업이 휘청일 만큼 타격이 컸지만, 임종철 명장은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로 스님과 사찰 관계자들에게 큰 신뢰를 얻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절집 창호는 매우 난도가 높은 수작업이다. 공부가 필요하고 부처의 뜻을 이해해야 하며 디자인부터 작업 방식까지 정교한 계획도가 필요하다. 그가 전국의 사찰을 누비면서 창호를 공부하고 연구한 것도 꽃살창호에 도전하면서부터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처음 만든 꽃살창호입니다. 당시 동국대 교육대학원장이었던 지관스님께서 경국사(서울 정릉)의 극락보전 꽃살문을 만들어보겠느냐는 연락을 해오셨죠. 이 작업을 하려고 전국 사찰을 다 돌아다녔어요. 꽃살창호는 그간 해본 일이 없었으니까 보면서 공부하고 연구했던 거죠. 그 와중에 내소사의 꽃살문을 보고 정말 탄복을 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기술이 빚어낸 극락정토로 가는 문이었습니다.”
 

임 명장이 불혹의 나이에 수능을 쳐 광주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고 이어 전남대학교 산업대학원에서 문화재학과 박사학위까지 받은 것은 어쩌면 이 끝없는 창호 공부가 만들어낸 갈급함이었을 것이다.

 

우리 전통창호의 대물림 작업이 필요하다

꽃살창호는 본래 궁궐의 정전이나 사찰의 전각에 쓰이는 것으로 전통창호의 백미로 꼽힌다. 그 무게가 묵직한 만큼 작업 역시 쉽지 않다. 임 명장은 꽃살문을 짜기 위해 먼저 도면을 그리고 도면의 문살 배치에 문양을 그려 넣는다.

짜임은 도면과 일치하게 먹선을 따라 상, 중, 하 문살 위치별로 3분 턱 따기를 한다. 그리고 실톱기계를 이용해 문양에 따라 오림질을 하고 오려진 꽃의 형태에 따라 조각을 한다. 뒤턱을 따기 전에 형태와 맞춤에 의해 사전 칼집 넣기와 짜임 자리를 따내고 조각이 된 문살을 각 위치에 놓은 채 조립함으로써 비로소 마무리를 한다. 창호 주문을 받으면 동료, 후배들과 함께 몇 달을 매달리는 이유다.
 

이러한 시간을 거치면서 그가 불교 신자가 된 건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꽃살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부처의 뜻을 깨우쳐야 하며 스님의 생활을 알아야 제대로 된 창호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련된 기술자로 창호를 만드는 것과 불교 신자로 창호를 만드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저는 절집 창호를 만들 때 두 가지를 생각해요. 지금 만드는 이 작품이 200년, 300년 동안 후손들에게 남는다는 사실 그리고 한 송이, 한 송이에 온전히 불심을 담겠다는 마음입니다. 창호는 그 집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요건이니까요.”
 

임종철 명장에게는 꿈이자 목표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사찰을 재건한 승장들의 솜씨가 지금의 문양의 산실이 된 만큼 현재 작업 중인 창호의 아카이브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문양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이건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 다 기록해둬야 합니다. 명장으로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길이 남겨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제가 지금 만드는 문짝 크기는 다 일정해요. 후손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전통창호가 혼자 만족하는 예술이 아닌, 일상에서도 효용성을 갖기를 바랍니다. 창호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진득한 불심을 담고 있으되 동시에 종교를 초월한, 빛과 공기, 사람을 오고 가게 만드는 전통창호의 가치를 지향하는 임종철 명장. 그가 영원한 꽃살창호 명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비로소 드러난다.
 

업데이트 2021-11-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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