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웅의 명장의 삶에는 핑계가 없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고 싶은 일에 망설임 없이 도전하는 차돌 같은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판금제관 직종에 몸담은 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웅의 명장은 자신이 가진 역량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했고, 명장이 된 지금은 대한민국 뿌리산업과 기술인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하다.
청년, 기술자의 삶을 시작하다
울산의 한 기술교육원에서 만난 최웅의 명장은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단단한 철을 쉼 없이 매만지고 있는 한 청년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 분위기가 여간 진지한 것이 아니다.
“내년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될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선수 선발을 위한 심사위원과 선발된 선수를 위한 지도를 함께 한 세월이 꽤 됐어요. 내년에 상하이 대회에 선수와 함께 나가는데 그동안 6번의 대회에 나가 5번 금메달을 땄고, 4차례 연속으로 철골구조물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금메달을 목표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간 후진 양성에 아낌없이 힘을 쏟아온 그가 마스크 위로 눈을 곱게 접어 웃는다. 최웅의 명장의 삶은 말 그대로 기술의, 기술을 위한, 기술에 의한 삶이었다. 그가 처음 산업 현장과 맞닥뜨린 시기는 겨우 16살.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서울에 올라와 공장에 취직한 게 그 시작이었다.
“야간에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반장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왜 어린 나이에 일을 주야로 하고 있느냐. 이렇게 몸 쓰는 일 말고 기술을 배워’라고요.”
그 말을 들은 최웅의 명장은 결국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정수직업훈련원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다니고 있던 야간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면접관 앞에서 “기능올림픽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라고 말했던 당찬 소년은 입학 이후 남들보다 곱절은 숨 가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낮에는 일반 학생들하고 똑같이 공부하고, 야간에는 기술 교육을 받았어요. 기능올림픽 준비를 위한 교육이었죠.”
고된 일과였지만 최웅의 명장에게 그곳은 천국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를 시켜주고 기술까지 가르쳐주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이론시험도 1등, 실기시험도 1등, 남들이 자격증 하나를 취득할 때 혼자서 다섯 개를 취득했던 시간이었다.
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리스트
그리고 새롭게 만난 현대중공업
최웅의 명장은 어린 나이에도 누구의 조언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한 길을 걸어왔다. 서울로 올라와 도금공장을 다니다가 옆의 자동차 부품 공장으로 옮긴 것도, 직업훈련원에서는 용접과로 입학했다가 판금제관 직종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
“어린 마음에 자동차 부품 공장이 훨씬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도금공장에 사표를 내고 자동차부품 공장에 찾아가 입사하면 안 되겠냐고 했지요. 훈련원에서도 용접 기술로 시작했지만 이왕이면 쇠를 자르고 구부리는 복잡한 기술들을 배워보고 싶었어요. 그때도 망설임 없이 전공을 바꿨습니다.”
누구의 도움이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그 시절, 믿을 거라곤 자신뿐이었다. 최웅의 명장은 서울 지방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서 용접 직종 1등을 한 후 전국기능대회에서는 철골구조물 직종으로 옮겨 거기서 또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도에 일본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철골구조물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다. 직업훈련원 면접 당시 당차게 말했던 소년의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현대중공업에는 1983년도에 입사했어요.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1등을 하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죠. 그리고 지난해 퇴직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현대중공업에서의 업무는 그에게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몇 년을 쇠를 만지며 훈련해온 덕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다른 게 있었다면 그 규모였다.
“현대중공업의 작업은 어마어마한 사이즈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작업물이 대형 선박, 원유시추선, 초고층 빌딩, 초대형 강교 등이었으니까요. 입사할 당시 서울에는 30층 이상 건물이 몇 개 없었어요. 한창 63빌딩을 짓고, 한강교를 만들던 시기였죠. 철골구조물을 전담하는 철구사업부에 배치가 되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철골구조물 건축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 대한민국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최웅의 명장의 이력은 눈부시다.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는 38년 동안 초고층 빌딩 건설, 서울의 한강대교와 성수대교 재건설, 부산 광안대교 등의 강교 공사, 조선 선박 및 해양 원유시추선 제작공사 등 국내외 대형철골구조물 공사를 무려 150여 개를 완수했다.
최고 기술자라는 타이틀은 거저 얻어지지 않았다. 맡고 있는 사업이 커질수록, 부하 직원이 늘어날수록 쇠를 구부리고 펴는 ‘기능’ 그 이상을 구현해야 했다.
“외국 공사를 하려면 영어는 기본적으로 해야 되고 각종 스펙과 관련 법규를 알아야 해요. 입사 당시 공식 학력이 중졸이었는데 1985년도에 국제대회에 다녀온 이후로 야학을 오랜 기간 동안 다녔습니다. 선후배들, 동기들과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움에 대한 욕구가 커졌고 일을 남들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공부가 필요했어요.”
대한민국 기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완벽한 철골구조물 공사를 수행하기 위해 달리다 보니 산업공학의 통계를 배우고, 건설공학 토목전공의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다. 그것은 오직 ‘장인 정신’ 하나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늘 신경 쓰던 부분이었어요. 소위 말하는 생산성이나 효율의 측면을 고려하여 경제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생산업무 수행 중 철골구조물 생산 자동화 생산 라인을 구축했고 다축 Gantry MIG 용접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1인이 여러 대 용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장치를 처음 개발했다. 여러 종류의 철골구조물 제작 자동화 장비를 개발하여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초대형 철골구조물 설치공법을 개발하는 등 그가 이루어낸 성과는 지금도 현장에서 살뜰하게 쓰이고 있다.
지난해, 평생을 몸담았던 현대중공업을 퇴직하고 직접 경영을 해보기 위해 스킬컴퍼니를 창업한 그는 ‘명장’으로 선정된 이후의 방향성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려면 결국 기술 기반산업이 발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자, 기능공이 더 대우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을 만들고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현실적인 조기 직업 교육 시스템과 국가 정책을 만들어 사교육비 등 현안 해결과 더불어 기능 강국에서 기능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최 명장은 나 혼자서만 잘하는 좁은 범위의 기술만 갖고는 명장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진 기술을 기반으로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칠 때 그리고 사회에서 역할을 했을 때 비로소 진짜 명장의 의미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후배 기술인들을 위해 좀 더 넓은 길을 닦을 것을 다짐하는 그. 매일 찾아오는 하루하루를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그에게 명장이라는 타이틀은 명예가 아니라 책임감, 그 자체로 보였다.
약력
1983 전국기능경기대회 철골구조물 직종 1위
1985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철골구조물 직종 금메달
2009~현재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철골구조물 직종 심사위원(심사장)
2016 울산광역시 최고장인 선정
2018~현재 전국기능대회 판금·철골구조물 직종 심사장
2020 대한민국 명장(판금제관 직종)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