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아버지의 술로 힘겨운 여러 해를 보냈다.
고3 때는 친구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인근 대학교 도서관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머리로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라고 되뇌었지만, 몸은 따라 주지 않았다.
운명처럼 만난 피아노조율사
졸업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졸업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었다. 음악에 푹 빠져서 대학교는 뒷전이 되었고, 대학교를 가지 못하는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에도 밴드생활은 계속했고, 몇 개의 알바를 하며 실내인테리어 학원, 자동차정비 학원에 다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당시 유망직종으로 불린 ‘병아리감별사’ 학원까지 알아봤다.
대학을 포기하고 직업을 갖기란 쉽지가 않았다. 군대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병무청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 아침, 운명적으로 피아노 조율을 만났다. 밥상을 차려놓고 TV를 켰는데 ‘KBS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에서 유망직종으로 피아노조율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딩동! 댕동! 땅땅땅’ 명확한 피아노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집중해서 봤다. TV에 출연한 피아노조율학원 선생님은 “학력 차별이 없다. 음악을 했던 사람, 뭔가를 꼼꼼히 잘 맞춰나가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전해 보라”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직업이었다. 그 순간, “평생 피아노 조율사로 살 거다” 스스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1남 5녀에 2대 독자로 6개월 복무 후, 바로 피아노조율 학원에 등록했다. 오전에는 성남에서 천호동으로 피아노조율학원을 다녔다. 1시부터 저녁 11시까지는 주특기를 살려 악기점에서 기타 레슨을 했다.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기타 레슨비로 학원비와 피아노조율 공구와 가방을 샀다. 피아노조율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속도에 맞게 뛰어든 학업
낙원상가를 거쳐서 피아노 매장에 취직했다.
첫 번째로 피아노조율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피아노조율산업기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여러 번의 고배를 마시고 피아노조율산업기사에 합격했다. 학원과 가정집 피아노조율을 주로 했는데, 자격증 하나로 조율 고객층이 달라지고 있었다. 음악 전공자, 연주단체, 합창단 등에서 끊임없이 조율 문의가 들어왔다. 2006년 전후로 한 달에 1,200만 원 억대 연봉의 피아노 조율비를 벌었다. 일하던 매장을 퇴사하고 피아노 악기 매장을 오픈했다. 열심히 피아노 조율에 매진했다.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20년 후에 대학교를 가겠다’라고 자신과 약속했다.
스무 살에 피아노조율사가 됐고, 40살에 대학교를 합격했다. 그 후로 8년간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피아노의 발달과정과 피아노조율에 관한 연구, 피아노조율 테크닉을 중심으로 석사 논문을 국회도서관에 남겼다. 대학원을 졸업했을 무렵, 여의도 ‘KBS 아트홀’이 개관하면서 전속 피아노조율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의 활동내역, 최종학력, 연주용 그랜드피아노를 조율할 수 있는 피아노조율산업기사 자격증을 써넣었다. 서류 제출과 면담을 통해서 ‘KBS아트홀’의 전속 피아노조율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조율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피아노 조율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맙고 신기했다.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다시금 기회를 찾게 해준 자격증
피아노조율사로 열심히 활동하던 2020년 초 코로나19가 국내를 강타했다. 피아노조율사 30년 인생 최대의 고비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온라인에 활동 프로필과 피아노 조율 사진을 올리고, 정성스럽게 글을 올렸다. 이번에도 피아노조율산업기사 자격증이 나를 살려냈다. 힘든 상황에서도 국가기술자격증이 단비가 되어 열심히 피아노조율을 해 나갔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건축도장기능사, 건축목공기능사가 눈에 띄었다. 피아노 칠 수리를 할 때 칠 도장은 필수였다. 2020년 4월, 건축도장기능사를 취득했다. 다음으로, 건축목공기능사를 취득하기 위해서 안산시에서 중계동까지 끈기있게 목공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몇 달의 도전 끝에 2020년 12월 24일,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지독하게 몰입하고 집중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피아노조율산업기사 자격증 덕분이었다.
피아노조율수리 1호 대한명인 선정
마지막 하나의 도전, 2021년 6월, ‘대한민국 피아노조율수리 대한명인’에 도전했다. 1년 반동안 지난 30년의 피아노조율사 활동 사진 등을 PPT 110장 정도의 분량으로 준비해 등기 우편으로 제출했다. 몇 주 후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피아노공방 현장실사와 면담 날짜가 잡혔다.
긴장된 마음으로 현장실사와 면담 준비를 했다. 세 명의 선정위원들이 도착했다. 2시간여의 시간이 흐르고 실사와 면담이 마무리됐다. 몇 주 후에 최종 선정 통보를 받았다. 대한민국 피아노조율수리 1호 대한명인이 된 것이다. 선정 서류를 봉투에서 꺼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선정에 이은 추대식까지 감격스러웠다.
삶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피아노조율산업기사 자격증은 나를 성장시켰다. “꿈을 품은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 국가공인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자격증이 무기가 되고 꿈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네 개의 국가자격증을 다시 한번 가슴에 품어 본다.
* 2021년도 국가자격취득 수기를 전합니다. 지면 관계상 실제 수기 내용을 조금 각색하여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