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과거에 박제되지 않고 시대와 호흡할 때 더 긴 생명력을 지닌다.
전통탈 전승자이자 (사)전통기능전승자회를 이끄는 신정철 회장의 고민 역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옛 전통을 이어가되 창의적 아이디어를 더해 공예 산업으로 발전시킬 방법은 무엇일까?
전통과 현대의 조화, 장인 정신과 산업의 만남이 상생으로 통하는 길을 그와 함께 모색해본다.
하회탈, 국보의 자부심을 새기다
콧대 높은 양반탈과 새침한 각시탈, 요염한 부네탈이 전통탈 전승자 신정철 회장의 손끝에서 금세 생명력을 얻는다. 목공칼이 한 번 지나간 자리에 눈웃음이 새겨지고, 익살이 담기는 덕분이다. 나무의 결을 읽으며 섬세하게 표정을 담아내는 신정철 회장은 어느덧 53년째 목공예 외길을 걷고 있다. 일찌감치 목조각 공방에서 익힌 솜씨로 호랑이, 용, 독수리 등 대작을 거침없이 작업했던 그가 전통탈에 빠진 건 1990년대 초, 안동 하회탈이 인기를 얻으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돈벌이 좀 되겠다 싶어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회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엉터리로 만든 탈이 너무 많이 보였어요. 하회탈은 우리나라 국보인데 이렇게 아무렇게나 만든 게 세계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안 되겠더라고요. 저부터 제대로 만들고 싶어 안동에 내려갔죠. 김동표 하회세계탈박물관장을 만나 하회탈뿐 아니라 봉산탈, 양주 별산대놀이탈 등 다양한 지방의 전통탈과 그들이 품은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죠.”
탈춤을 아는 만큼 탈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연기자가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의 성격을 탈 하나에 오롯이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백정은 누가 봐도 백정, 양반은 누가 봐도 양반일 수 있도록, 텃세가 센 안동의 양반은 콧대가 높게 표현되도록 말이다. 많은 걸 생략하고 흉내만 낸 엉터리 전통탈과 비교해 캐릭터 하나하나의 성격을 섬세하게 머금고 있는 신정철 회장의 탈은 단연 ‘고급탈’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시중의 탈과 차별화를 위해 일부러 사포질을 안 하고 칼로 깎은 자국을 그대로 살려두는 것은 ‘서진공예’표 탈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전통탈을 제대로 잇는다는 자부심은 2013년 (사)전통기능전승자회 전승자로 이름을 올리며 전환점을 맞았다. 전통기능전승자회는 사라져가는 전통 공예를 이으면서도 현대에 맞게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접목해 산업으로 일굴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협회이다. 인간문화재가 전통 기법 그대로를 이어가는 데 집중한다면, 전통기능전승자는 사라져가는 전통을 되살려 현대적 감각으로 상품화, 다변화하는 데 집중한다는 게 차별점이다. 최고로 인정받는 위치에서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에게 전통기능전승자는 또 다른 도전의 기회였다.
전통기능전승자회, 더 창의적이고 역동적으로
올해 전통기능전승자회 회장으로 취임한 신정철 회장은 그동안 사무국 없이 운영되던 협회에 사무국이 신설되면서 역동적으로 이끌어간다는 각오를 다진다. 특히 전승자 자격 조건이나 지원 제도 등 그동안 불합리하게 이어져 온 체계를 시대에 맞게 바꾸는 데 힘을 쓸 계획이다.
“전승자 자격 조건이 해당 분야 25년 경력에서 사업자등록 후 15년 경과로 바뀌었어요. 누가 봐도 평생 전통 공예에 매진한 분인데 단지 사업자등록을 늦게 해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사업자등록 후 15년 후면 전승자의 나이가 너무 많아지는 문제도 있죠. 또 보조금이 전승자는 월 80만 원, 계승자는 20만 원인데 25년 전 기준이에요. 젊은 후계자를 양성하거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마저도 최대 5년까지만 지원하고 있어 전통기능전승자로서의 활동을 제대로 잇기 어려운 실정이죠. 이 역시 개선해야죠.”
전통기능전승자회의 핵심은 시대와의 호흡이다.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며, 창의적인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신정철 회장은 이를 위해 젊은 후계자를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다양한 공예품을 상품화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코로나로 잠시 멈추었던 합동 전시와 체험 봉사, 세미나 등의 불씨를 살려 역동적인 협회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올해 상반기 워크숍에서는 회원들 간의 단합과 힐링에 초점을 맞춘 한편 전승자 간 협업을 통해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방안을 강의로 마련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으로 하는 작업 능력이 뛰어나잖아요. 협회 내 전승자, 계승자, 이수자, 준회원 수를 늘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울려 고민하며 새로운 상품을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는 장을 만들겠습니다. 전승자의 기술력과 젊은 사람의 창의적 감각이 어우러지도록 협회 차원에서 노력해야죠.”
우리 시대의 탈과 탈춤의 힘
신정철 회장 역시 선조들의 지혜와 전통을 뿌리에 두면서도 요즘 시대에 맞는 탈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요즘 사람의 얼굴에 맞게 탈의 크기를 줄이고, 밝은 조명을 고려해 화려한 채색보다 나무결을 자연스럽게 살리는 마감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스토리이다. 탈춤은 시대상을 반영하며 서민들의 스트레스를 날려준 대중적인 놀이문화였다. 이에 신정철 회장은 현시대를 담은 탈춤에 맞는 새로운 탈을 제작하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탈춤의 매력은 역할극을 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데 있어요. 직장인이라면 부장도 되고, 막내도 되어 속에 있던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스트레스도 푸는 거죠. 교육사업으로도 충분히 권장할 수 있고요. 시대를 반영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또 탈춤이 전신운동이거든요. 건강에도 좋습니다.”
애오개본산대놀이보존회 소속으로 10년 넘게 탈춤을 즐겨온 신정철 회장은 매주 화요일 어김없이 탈춤을 추러 나선다. 그저 뛰어난 목공 실력으로만 탈을 만들었다면 최고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직접 탈을 쓰고, 탈춤의 흥과 한을 온몸으로 느끼는 이가 만드는 탈이기에 칼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표정이 섬세하게 달라진다. 연희자가 대충 몸짓을 해도 표정이 다 말해주는 탈춤의 힘을 신정철 회장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탈춤은 K-팝의 원조가 아닐까요. 마당놀이는 관객과의 소통이 기본이고, 팔먹중이 돌아가며 춤을 겨루는 이야기는 댄스배틀의 원형이에요.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4/4박자 우리 휘모리장단과 통하고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탈춤과 전통탈의 세계화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가 만든 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분명 한 가지 표정인데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과 감정이 다채롭게 다가온다. 그것이 53년 동안 나무를 조각하고 탈을 만든 전통기능전승자의 힘이 아닐까. 신정철 회장의 강하지만 부드러운 칼끝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를 품은 탈과 놀이가 탄생할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