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짓는 일은 멋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50년 가까이 옷 패턴을 제작해온 양민석 모던라인 대표의 한 줄 가르침이다.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여성복의 유행이 돌고 돈 오랜 시간 동안 늘 ‘소통’하며 지켜 온 최고의 자리.
그리고 지금, 70대의 나이에도 열정을 불태우는 양민석 대표를 만나본다.
글 강현숙 사진 이성원
금메달의 무게, 실력으로 풀다
1970년대 대한민국 패션의 메카는 단연 명동이었다. 갓 스무 살에 접어든 양민석 대표도 명동에 발을 디뎠다. 어릴 때부터 눈썰미가 좋은데다 손끝이 야무졌던 그를 눈여겨본 사촌의 권유 덕분이다. ‘재단사’, ‘패턴사’로 불리던 모델리스트로서의 첫걸음은 끝없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실밥을 뽑고, 다리미질을 배우고, 바느질을 하나하나 익히며 기초를 다졌습니다. 가봉을 도와 수정 사항을 표시하고 재봉하도록 보조하며 옷 전체의 구성을 눈에 넣었고요. 계절마다 소재가 다르니 계절을 한 바퀴 돌아야 제대로 기본기가 잡히겠더라고요.”
양민석 대표는 서두르지 않았다. 옷 한 벌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패턴부터 덤벼들면 옷의 구조적인 연결에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복은 곡선이 많고 입체감이 중요하다. 그림으로 표현된 디자인을 실제 입을 수 있는 옷으로 구현해주는 패턴 작업은 그만큼 섬세해야 한다.
공식처럼 내려오는 패턴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옷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또 하나, 어떻게 해야 더 쉽고 빠르게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남들과의 차이점이랄까요. 시키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나름대로 분석해서 내 방식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게 훗날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되더라고요. 국제기능올림픽에 관심을 가진 것도 외국 친구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였어요.”
서울 대표로 기능올림픽 지방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양민석 대표는 전국대회 금메달을 거머쥐며 1977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열린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했다. 긴장도 잠시, 연습한 대로 실력을 발휘한 결과는 값진 금메달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서부터 당시 중앙청까지 이어진 카퍼레이드와 시민들의 환영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하지만 ‘과연 내가 금메달 자격을 갖췄는가?’라는 고민도 깊어졌다. 주변의 달라진 시선에 으쓱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본 양민석 대표는 더 치열하게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셋의 일이었다.
사람 중심 제도법, 틀을 깬 도전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어요. 체격이 상당히 큰 여성분이 오셨는데 속으로 ‘아이쿠’ 소리가 절로 났죠. 익힌 대로 옷을 만들었지만 제가 봐도 별로였습니다. 기존의 제도법은 통계치에 기반해서 등분을 나누거든요. 당연히 다양한 체형을 지닌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양민석 대표는 틀을 깨기 시작했다. 기존보다 4~5개의 치수를 더 잰 다음 이를 반영한 제도법을 만든 것이다. 누가 입어도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옷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특이 체형의 결점을 보완하는 패턴으로 명성을 쌓았다. 원통형 체형을 보완하기 위해 다트 수를 추가하는 대신 길이는 줄였고, 다리 길이가 차이 나는 고객을 위해서는 바지 길이를 줄이는 게 아니라 골반에서 조절해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완성했다. 멋진 옷 이전에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드는 모델리스트의 매력을 제대로 즐기게 된 것이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멋진 옷을 구상해도 입을 수 없다면 그림에 불과합니다. 라인을 잡아 입체감을 살려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만들어 주는 게 바로 모델리스트의 역할이죠. 또한 내 방식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자세로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즘 감각도 빨리 따라잡을 수 있어요.”
어느덧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디자이너와 손발을 맞추는 양민석 대표. 하지만 어려움은 없다. 디자이너의 방향과 의도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때론 자신의 경험을 노하우로 전하며 소통하다 보면 어느새 나이차는 무색해진다. 덕분에 유행에 민감한 패션업계에서 그는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후배들과 함께 꿈꾸는 모델리스트
일찌감치 최고의 자리의 오른 양민석 대표는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단으로 활동하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기본 제도법보다 까다롭지만 실무에 활용도가 높은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했고, 기능올림픽 전국대회 심사장을 역임하며 룰도 혁신적으로 바꿨다. 실제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평가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더 까다로울 수 있죠. 배우기도 힘들고요. 하지만 의상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친구들은 꼭 다시 찾아와 더 깊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명품 브랜드 구찌를 거쳐 알렉산더 맥퀸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국내 패션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도 여럿 있습니다.”
양민석 대표는 자신의 업적보다 제자들의 활약상을 더 신나게 풀어 놓는다. 그는 늘 그랬다. 일본식 용어투성이인 패션 전문 서적에 한계를 느끼며 교재를 손수 만들고, 패턴 설계 과정을 영상으로 담았으며, 곡선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 곡자를 직접 고안해 특허까지 냈다. 당연히 후배들을 위한 행보였다.
“조만간 유튜브를 시작하려고 해요.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덜 겪을 수 있도록 배움을 전하는 게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친구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어요. 꿈꾸는 자는 성공한다고,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뤄진다고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양민석 대표가 후배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은 기술이 아니라 ‘꿈’이었다. 꿈을 가져야 배움의 의지가 생기고, 치열하게 배워야 남과 다른 기술력을 다질 수 있다. 세세한 기술은 그가 가르칠 수 있지만 꿈꾸는 것만큼은 각자가 해야 할 몫이다.
만약 그 꿈이 아득하다면 양민석 대표의 작업실에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묵직한 가위와 누름쇠, 올림픽 출전 당시 꼈던 골무, 20대 청년부터 지금까지의 성장사가 담긴 사진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공간. 그곳에 후배들과 함께 꿈꿀 준비를 마친 근사한 금메달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