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청자, 천년의 시간을 잇다
    박병호 대한민국 명장(공예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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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물과 불로 빚어낸 고아한 자태.
은은한 옥빛과 유려한 선을 품은 고려청자의 기품은 직접 마주해야 오롯이 전해진다.
청자와 함께한 지 37년, 박병호 대한민국 명장은 이제 ‘어떻게 빚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이을까’를 고민한다.
천년 후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고려청자를 빚을 수 있도록, 맥을 잇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명장이기에 마땅히 가야 할 길이다.
 

 

갑작스러운 시련, 도예의 길로 이끌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었다. 대학 4학년, 교사를 꿈꾸며 교생실습을 준비하던 공학도에게 갑자기 찾아온 돌발성난청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좌절 대신 도전을 택하고 찾은 곳은 경기도 이천. 박병호 명장이 도예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다.
 

“귀가 안 들려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어요. 공고에 공대 출신이라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자신 있었고, 평소 도자기에도 관심이 높았거든요. 그렇게 스물여섯에 효천요에 취직했습니다. 뭘 모르니까 용감할 수 있었어요.”
 

 

1987년 당시 도자기공장은 도자 성형, 그림, 조각, 유약 만들기, 소성 등 철저한 분업으로 돌아갔다. 초보인 그는 당연히 흙을 만져볼 일이 없었다. 유약을 입히고, 가마에 기물을 넣어 불을

조절하는 가마 소성이 그의 임무. 감사한 일터였지만 나만의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물레를 배울 곳을 다시 찾아 나섰다. 이어서 취직한 부림요도 청자를 만드는 곳이었던

건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미술을 전공한 대표님이 옛 묘지에서 나온 청자 파편을 보여줬어요. 청자에 완전히 홀리는 순간이었죠. 또 제가 공부한 기계·전자도 새로운 부품으로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창작품이거든요. 손으로 나만의 것을 만든다는 즐거움이 서로 통하더라고요. 그렇게 점차 도예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죠.”
 

청각장애도 도예가에는 몰입이라는 장점으로 이어졌다. 도시락을 두 개씩 챙겨 밤늦도록 혼자 남아 기술을 연마한 그는 결국 5년 만에 자신만의 작업장 ‘서광요’를 열었다. 가마도 없는

널찍한 공간뿐이었지만 박병호 명장은 아직도 그 설렘을 잊지 못한다.
 

 

세계를 매료시킨 선을 입은 청자

첫 1년은 고전했지만 곧 이천 도자기의 호황기와 맞물려 주문이 밀려들었다. 도자기를 만들고 굽기를 반복하는 동안 박병호 명장은 문득 현장에서 익힌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갈증이 몰려왔다.
 

“이론과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마침 명지대 대학원에 도자기기술학과가 개설되어 입학했는데 정말 눈이 뜨이더라고요. 흙의 원리를 파고들어 우리 고유의 청자색을 내면서 1,280℃의 고온을 견딜 수 있는 강도 높은 흙과 유약을 개발했습니다. 균열 없는 고강도의 청자 생활자기를 생산하는 데 보탬이 되는 연구였죠.”
 

전통 자기에 ‘박병호’만의 결을 입히는 데도 몰두했다. 고려 시대의 청자가 현대에도 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미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그는 나름의 선을 입히기 시작했다. 익히 잘 아는 설계 도면 속 균형미가 떠오른 것이다.
 

“도면도 선으로 표현한 하나의 그림이거든요. 특히 작업자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복잡해 보여도 질서와 균형이 중요합니다. 미술을 공부하지 않아 더 과감하게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요.”
 

 

고풍스러운 청자와 절제된 선의 조화는 현대적 감각으로 거듭났다. 그 진가는 곧 세계와 통했다. 2006년, 세계적 경매소인 영국 런던 본함스 경매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출품한 작품이 모두 판매된 것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개인적인 서사가 담긴 박병호 명장의 청자는 그렇게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박물관 안의 고려청자가 아니라 요즘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청자를 고민한다. 전통 고려청자 기법은 고집스레 이어가되 지금 이 시대의 감각을 새겨 넣는 게 전통을 잇는 명장이자 예술가의 사명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천년의 숨결 잇는 명장의 사명

이천에 터를 잡고 묵묵히 청자를 빚어온 박병호 명장은 올해 8월, 2023년도 대한민국 명장(공예직종)에 선정됐다. 청각장애로 쉬이 자리를 찾지 못하던 그를 효천요에서 처음 받아줬을 때의 두근거림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지난 37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울컥했어요. 장애가 있다고 동료들이 더 많이 가르쳐주고 도와줬거든요. 견제하거나 귀찮아할 수 있는데 손을 끌고 가서 하나라도 더 알려줬어요. 명장에 오르기까지 도움 주신 분들이 참 많아요. 그분들께 고마움을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미약하게 소리가 들리고,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지만 장애는 장애였다. 그런 그를 누구 하나 내치지 않고 보듬고 도와준 고마움을 잘 알기에 2004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재활시설에서 도자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천 관내 초등학교를 돌며 도예 특강을 펼쳤다. 특성화고등학교를 찾아 기능인 선배로서 조언을 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기능인은 결국 습관을 만드는 일이거든요.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어렵지만 제대로 익혀두면 시간이 흘러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고비를 이기고 과정을 밟아가면 독보적인 기능인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후배나 학생들에게 강조합니다.”
 

 

‘선생님 찰읔 만드는 거 재미있어요’라고 쓴 비뚤비뚤한 초등학생의 편지를 핸드폰에 소중히 담아둔 박병호 명장. 도자기를 만들다 보니 어느덧 선생님의 꿈도 이뤘다고 환하게 웃어 보인다. 사실 그는 고려청자를 빚는 마지막 세대이자 막내다. 자칫 맥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더 빼어난 작품을 만드는 일이 아닌 청자의 대를 이을 환경을 만드는 일에 더욱 집중하고자 한다.
 

“천년을 이어온 유산인데 후대에 잘 전해야죠. 고려청자는 누구나 잘 알지만 상감기법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어요. 일단 초등학교 대상의 학년별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흥미를 높이고 싶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우리나라 국보급 도자기가 전시된 일본 동양도자미술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서 선배 명장님들과 워크숍을 겸한 순회 전시를 열고 싶습니다.”
 

도자 교육에서 소외된 곳이나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말하는 박병호 명장. 그는 우리 도자기와 고려청자가 일상에서 가까이 살아 숨쉬기를 꿈꾸며 새로운 길을 그려간다. 그 관심이 고려청자의 맥을 잇는 시작일 테니 말이다.

 

 

업데이트 2023-10-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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