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고정관념을 걷어내고 시작하자. 운동하는 사람은 책과 거리가 멀다는 둥, 덩치 큰 남자 어른과 귀여움은 상극이라는 둥, 한 분야에 걸출한 재능이 있으면 다른 것들은 시시할 거라는 둥…. 그래야 진짜 육체파 지식노동자 김남훈이 보인다. 그야말로 기막힌 반전, 그래서 매력 있는, 현실로 소환된 열정히어로를 만났다.
판타지 속 히어로, 현실이 되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기막힌 반전이 발견된다. 일일이 나열하기 버거울 만큼. 이 묵직한 히어로로 말할 것 같으면 현역 프로레슬러이자 스포츠 해설위원, 올해만 세 권의 책을 더 낼 작가다. 게다가 번역을 업으로 삼을 만큼 일본어는 수준급, 방송에서 시사평론도 한다. 이쯤 되면 대체 직업을 뭐라 해야 할지부터 난감해진다. 그러나 다행히 어떤 수식어를 입혀도 맞춤 수트마냥 착 맞아떨어진다. 이게 바로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매력적인 진짜 이유다.
그는 스스로를 ‘창조형 육체파 지식근로자’라 명명한다. 영역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관심사와 활동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재밌어서 취미처럼 시작한 일이 직업으로 발전한 경우가 대부분. 그의 삶 중심에 있는 프로레슬링도 그러했다.
“남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강한 것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특히 어린 시절, 수컷으로서의 자각은 있지만 자기 몸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웅에 몰입하죠. 저는 그 대상이 프로레슬러였어요.”
지금은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지만 그가 어렸던 시절만 해도 프로레슬러를 꿈꾸지 않은 소년이 몇이나 될까 싶을 만큼 관심이 대단했다. 그 역시 프로레슬러에 대한 동경으로 어린 날을 보냈다. 미군부대가 있는 동네에 산 덕에 남들보다 빨리 미국레슬링연합(WWF) 중계를 보며 자랐으니 그 정도가 좀 더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년 김남훈에게 헐크호건과 마초맨은 손에 잡힐 듯 현실감 있는 히어로였다. 가상이 아니라 실제였다. 키가 자라고 덩치가 커진 이후에도 히어로는 여전히 그의 가슴에 살았다. 스물여덟, ‘이 일을 지금 안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론은 하나. 하고 싶으니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부터 품고 산 로망이자 판타지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말한다. 인기가 시들었다고 좋아하는 걸 안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백번 맞는 말이다. 모든 열정의 시작은 가슴 뛰는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더 잘하고 싶은 열망, 열정을 깨우다
그는 프로레슬링을 ‘액션 오페라’라고 표현한다.
익히 아는 스토리지만 배우들의 실제적 연기와 노래에 감동하는 오페라처럼, 시나리오가 있지만 승패를 향해 가는 프로레슬링 동작들 역시 실제라는 거다. 한마디로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선상이다.
자유자재로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인생 역시 프로레슬링과 닮았다. 필살기는 로우킥. 삶의 패턴을 봤을 때, 한 번에 큰 데미지를 주지는 않지만 꾸준히 상대에게 데미지를 전달하는 로우킥처럼 꾸준함 레벨만큼은 세계 최강이다. 사람과 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느덧 방송 경력도 10년을 바라보는 그. 2007년 UFC 해설로 시작해 미국레슬링연합(WWF) 해설까지 섭렵했다. 재치 있는 입담과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일례로, 보다 생생하게 경기를 표현하기 위해 추성훈 선수의 종합격투기대회(UFC) 데뷔전 해설 때는 일부러 집이 아닌 낯선 숙박업소에서 며칠간 지냈을 정도다. 타지에서 선수가 느낄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하고자 했던 거다.
“종목은 다르지만 저도 링 스포츠를 하는 사람으로서 선수들의 감정 파악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해요. 기술적인 부분은 기본이고요. 방송 녹화 전에 경기를 수차례 보고 기술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는 건 물론, 시합이 성사된 이유 등을 전개해줌으로써 시청자들이 ‘싸움이 아닌 시합’을 유쾌하게 볼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도 하죠.”
이런 그에게 2016년은 또 한 번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다. 오랫동안 방송을 하다 보니 확실한 콘셉트를 갖추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프로레슬러들이 외모나 캐릭터를 바꾸는 걸 뜻하는 ‘기믹체인지’를 계획하고 있다고.
“프로레슬러들 입장에서 기믹체인지는 선수생활하면서 서너 번이면 많이 하는 거예요. 캐릭터니까요. 저 같은 경우 그동안 친근한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너무 편하게만 다녔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수트도 자주 입고, 김남훈 하면 생각나는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스카프도 자주 활용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친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자수성가로 돈을 많이 번 친한 동네 형’이라 할 수 있겠죠.”
다재다능 재주, 영역을 넓히다
작가 김남훈. 거친 프로레슬러 대신 말랑말랑한 작가 타이틀을 붙여도 역시 훌륭하게 어울린다.
지금까지 낸 책이 십 수 권, 글은 요즘도 꾸준히 쓰고 있다. 읽고 쓰는 것에 대한 그의 취미는 아주 오래됐는데, 애초에 지적 호기심이 굉장히 풍부한 부류라 할까. 오죽하면 일본어로 된 오토바이 잡지를 읽으려고 어학공부를 하다 일본어 책까지 냈을 정도다. 시시하게 하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한 번 시작한 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책은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많이 읽어요. 그리고 많이 쓰고요. 글을 읽는다는 건 정보 전달력 밀도로 보자면 가장 높은 수준이거든요. 일정 부분 대중연예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생각을 키우기 위해 글을 많이 읽고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시사 뉴스 토크쇼인 CBS ‘박재홍의 오늘하루’에 출연 중인데요. 조금 더 나아가 시사평론 분야 일을 더 확장해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이토록 많은 재미를 발견하고 탐닉할 열정은 대체 어디서 솟는 걸까. 그는 도전 자체에 큰 의미를 두는 타입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열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즐거움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현실을 가볍게 여기는 건 결코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프로가 된다는 건 찬사만큼 비판의 무게도 견뎌야 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종은 진작 울렸다. 인생의 링을 평정할 프로레슬러 김남훈의 대활약은 이 순간 한창 진행 중. 바야흐로 자신만만한 히어로의 전성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