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궁금했다.
어떻게 흙으로 저렇게 커다랗고 다부진 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옹기에 발을 들인 건 그때부터였다.
숱한 역경을 겪으며 방황하던 날들도 있었지만 어느덧 그 시간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됐다.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라 했던가. 지천명(知天命)을 지나는 그는 이제 옹기가 자신의 길임을 안다.
글. 김혜민 / 사진. 이승훈
고집불통 겁 없는 소년,
옹기장의 길로 들어서다
흙을 반죽하여 물레를 돌려가며 옹기 모양을 잡고 잘 다듬어 건조시킨 후 다시 유약을 발라 1200도씨의 고온에서 구워내기까지. 옹기는 여전히 그 속에 흙 기운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호흡한다.
우리조상들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해 생명을 부여받은 그릇, 옹기.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피부와 머리카락 색 다른 외국인들마저 이 생명력 넘치는 그릇에 매혹된 까닭이다. 그리고 올해로 벌써 36년째, 기나긴 세월을 옹기와 더불어 살아온 허진규 옹기장은 그 그릇의 우수성을 알리는 접점에 서있는, 살아있는 문화 그 자체다.
지난 몇 년간 미국, 호주, 유럽 등을 순회하며 숱하게 옹기 제작 시연을 해온 그는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서 울주군에 위치한 외고산옹기마을에 터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옹기집성촌으로 유명한 여기가 바로 제 고향입니다. 아버지 역시 평생을 옹기장으로 활동하셨지요. 태어난 환경부터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다란 항아리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자랐으니 자연스레 옹기를 배우겠다고 선언하게 된 거지요.”
겁도 없이 옹기의 세계에 덜컥 발을 들이려는 아들을 두고 부모는 필사적으로 반대했단다. 그 자신이 옹기장이로 평생을 살아왔으니 얼마나 외롭고 고되며 힘든 일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 터.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꺾일 줄 모르는 아들의 의지에 결국 부모도 항복을 선언했다고. 이후 그는 중학교 진학까지 포기해가며 오로지 옹기 하나에만 전념하기에 이른다.
“옹기라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배우기 힘들어요. 최소 15년 정도는 배워야 제대로 옹기를 만드는 기능장으로 활동할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언뜻 보기엔 재미있어 보여도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 만만치 않습니다. 테크닉 발전은 더욱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래도 계속 했습니다.
때로는 자투리 시간을 내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도자물레까지 스스로 배워나갔죠. 나중엔 제 본연의 기술과 더해져 굉장히 재미있는 기술이 나오더라고요. 옹기 제작시연도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었고요. 스스로에게 굉장히 뿌듯했죠.”
옹기가 삶이 된 청년,
시련도 굳건히 받아들이다
사실 허진규 옹기장이 기술을 연마할 무렵은 이미 플라스틱 용기가 유통되기 시작해 옹기가 사양산업의 길로 접어들던 때였다. 때문에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옹기업 종사자 수가 300여 명 남짓할 정도로 영화를 누리던 마을은 이제 고작해야 30명, 그나마도 기능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극소수가 됐다.
그러다보니 옹기를 매개로 맺어온 선배들과의 나이 차이도 크다. 그와 선배들의 평균 나이차는 약 10~15년 이상. 그 커다란 틈이 아쉬워선지 그의 선배들은 유난히도 살뜰히 그를 챙긴다.
“35살 때였나? 무릎이 퇴행성이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계속 이렇게 무릎을 쓰면 앞으로 못 걷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충격적이었죠. 지금이야 흙반죽이며 옹기성형에 기계의 도움을 받지만 당시만 해도 모두 제 힘으로 해내야 했으니 체력적으로 무리가 온겁니다. 제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옹기는 그의 삶 자체라는 것. 내가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옹기 맥이 끊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못 걷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배양성을 할 때까지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결정지었단다.
“지금은 학교에 나가서 옹기수업도 진행하고 있어요. 졸업 후에도 계속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에 한해 마을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고요. 그리고 여기 작업실에서 수련중인 학생이 바로 저의 공식적인 무형문화재 전수자입니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건만 몇 년째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며 수련에 임하는 수제자가 내심 기특하기만 한 허진규 옹기장.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제자와 함께 실용옹기 제작에 힘쓰는 것이다.
“옹기는 예부터 항상 생활에 밀접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창고에서는 곡식저장용기로, 부엌에서는 각종 장이며 찬의 저장용기로 또는 농사용품이나 문방사우로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죠. 저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어울리는 옹기를 만들고 싶어요. 인테리어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살아있는 문화재,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옹기장의 길을 선택한 허진규 옹기장. 그동안 그는 다사다난한 삶의 얼굴을 마주하며 더욱 단단해져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기억하는 가장 보람되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지난 2008년, 미국인들 앞에서 옹기 제작 시연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의 도자협회모임인 엔시카(NCECA)에서 여는 행사였는데 미국의 도자기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관해 연구분석하는 명망 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죠. 이들은 매번 전 세계의 도예작가를 2명씩 선정해 행사에 초청하는데 거기에 제가 우리나라를 대표해 초대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우리 옹기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약 30여 개국을 순방하며 자진하여 국위선양을 해오고 있다. 건강이 염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경이로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 서면 그 순간은 몸이 아픈 것도 절로 잊혀진다고. 옹기를 만드는 기술 그 자체를 높이 사는 외국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든단다.
막상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는 옹기를 그저 김치를 담는 저장그릇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이유일 터다. 그는 몇 년 전 열린 기능경기대회에서 출제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야기를 덧붙이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당시 울산에 지역특성화라고 해서 ‘옹기’부문도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죠. 그때 출제위원을 하며 느꼈던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렸던 도면을 꺼내어 보곤 하니까요. 기능경기대회 종목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분명 그 기술력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배우는 이가 없어 아쉽게도 5년 만에 종목을 접어야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는 젊은이들이 자신만의 기술을 전문화시켜 그 분야의 장인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고강조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뜻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 옹기. 그 속에서 우리네 고유의 음식인 된장, 간장, 김치 등은 맛있는 발효를 시작한다.
소성 과정에서 생긴 미세한 숨구멍 사이로 공기가 드나들며 미생물의 활동이 조절되는 것이다. 그뿐이랴. 쌀, 보리 등의 곡식을 담으면 다음 해까지 썩지 않는다. 고온의 가마 안에서 나무가 타며 생기는 연기가 옹기의 안과 밖을 휘감으며 방부성 물질을 덧입히는 덕분이다.
이렇게 수세기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우리문화 ‘옹기’를 세월과 함께 고이 지켜낸 무형문화재 허진규 옹기장. 그는 오늘도 앞으로도 변함없이 작업실 한편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우직이 앉아 옹기의 미래를 빚어나가는 데에 여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