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젊음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그러니 이룬 게 부족하다고 상심할 것도,
손에 쥔 게 조금 더 있다고 우쭐해할 것도 없다.
박기태랩 박기태 대표는 그래서 고요하다.
그저 묵묵히 나무 만지는 사람으로서의 길에 집중할 뿐이다.
남들이 탐낼 만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는 법도 없다.
나이테 새겨지듯, 고요하지만 선명하게 내공을 쌓아가는 그를 만났다.
글. 정은주 / 사진. 이성원
마음껏 도전하고 기꺼이 한계를 마주하는 젊음
“나무 만지는 사람들은 다 착해요.”라는 그의 말은 진짜였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무와 닮았다 할까. 도무지 꾸밈이 없다. 있는 그대로를 훤히 드러내 보이는데, 그게 또 매력 있다. 자신만만한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싱그러운 멋이다.
박기태 대표의 하루 대부분은 작은 작업실 안에서 채워진다. 나무 치수를 재고, 대패질을 하고,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고…. 열일곱 살 때부터 해온 건데도 매일이 새롭다.
“공예작품 하면서 이것저것 많은 시도를 한 터라 지금은 오히려 단순한 형태를 추구합니다. 자연소재를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게, 미니멀하게 만드는 게 첫 번째 디자인 방향이에요. 특히 가구는 소재 자체가 미니멀하지 않아 더욱 그러하죠. 경험을 통해 제가 깨달은 건 나무를 이기면 안된다는 거예요. 설계를 할 때도 나무가 움직이고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요. 가능한 한 나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이렇게만 들으면 인생도 아주 여유롭고 느긋할 것만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치열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가구나 소품 만드는 것부터 인테리어까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즘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다고 돈이나 명예를 좇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돈 안 되는 일에 더 열과 성을 쏟는다.
“작년에 이 공간을 오픈했는데요. 3년 전인 창업 1년차 때는 사업 방향만 찾았어요. 고민 끝에 10년 동안은 연구 개발과 경험 쌓기를 사업 목표로 삼고 가기로 했어요. 당장의 매출을 늘리는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재밌어 보이는 것, 남들이 안하는 것, 남들이 힘들어하는 것들에요. 그래서 이름에 ‘랩’을 붙인 거예요. 이곳은 뿌리내리는 곳이 아니라 연구 공간이니까요. 그렇게 하고 싶은걸 실컷 경험한 40대 이후에는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죠.”
차곡차곡 쌓은 경험으로 일궈낸 값진 오늘
박기태 대표가 목공을 처음 접했던 열일곱 살 때, 담당 선생님은 그에게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몇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역시 타고난 손재주가 서툴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뒤도 옆도 보지 않고 노력했다.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연습에 몰입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처음에는 목공보다 장학금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적어도 한 가지 기술은 제대로 배울 수 있겠다는 점에도 매력을 느꼈고요. 그런데 옆 친구보다 실력이 부족하니 계속 해야 하나 고민을 했죠. 그만두기에는 배운 게 너무 적다 싶어 더 해보기로 마음먹었고, 노력 덕분인지 조금씩 발전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때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스무 살 되던 해에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실내장식부문에서 금메달의 영예를 안았다.
“존경하던 선배를 이기고 오른 자리고, 훈련비로 빚까지 진 상태라 대회에 출전할 때 어깨가 굉장히 무거웠어요. 당시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금메달을 못 따면 죽는다는 각오로 대회에 임했어요. 중학교 때까지 상장 한 번 받은 적 없던 제가 공예로 태극마크를 달고, 금메달까지 따게 됐으니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죠.”
대학에 진학해서도 그는 늘 나무와 함께였다. 대학원 때 역시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창작해 냈다. 대학졸업 때는 대한민국인재상까지 수상했을 정도니 얼마나 깊고 진지하게 작품 활동에 파고들었을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이후에는 4년 정도 회사에 몸담았다. 전시설계팀에서 박물관이나 홍보관 등 설계하고 시공하는 일이었다. 성격이 약간 다른 분야였지만, 새로운 기법과 소재 등에 대한 시도가 많은 공예의 경험을 살려 즐겁게 일했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한 건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한 선택이었다. 회사일도 정말 재미있었지만 나무에 대한 갈망을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고.
“회사에서 새로운 분야를 흡수하면서 저의 기술을 썩힌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 계속 뭔가 꿈틀대는 걸 모른척할 수는 없더라고요. 그리고 후배들에게 목공작업의 비전을 이야기할 때 떳떳하지 못한 점도 진로를 바꾼 이유 중의 하나에요. 극소수의 사람만 선택하는 길인만큼 제가 기술쪽으로 걸으면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일 하면서도 즐겁게 잘 살 수 있다는 걸요.”
노하우를 나누며 행복을 준비하는 내일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수상자로 장려금을 받은 만큼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는 게 박기태 대표의 지론이다. 그래서 창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 기술교육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소자 강의와 고등학교 및 대학교 강의는 물론 기능올림픽기술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러한 활동 자체가 공부라며 박기태 대표는 노하우가 노하우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경험이 쌓이는 것이 곧 공부에요. 그로 인해 응용 범위가 늘어나고, 응용으로 또 하나의 경험이 쌓이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니 서로에게 이로운 일이죠.”
단, 그 과정에서 소통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철칙은 반드시 지킨다. 가구를 만들 때 공간에 어울릴 수 있도록, 취향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문자와 최대한 많은 의견을 나누는 모습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데 대회 출전을 앞둔 선수들에게 교육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선수의 가정사부터 생활패턴까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아주 작은 부분까지 경청한다. 소위 ‘족집게 강의’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다.
“짧은 강의라도 기술 수준이 뛰어오를 수 있도록 가르치려면 오직 그 선수만을 위한 강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작업하는 걸 본 후 진단을 하고 개선 가능한 방향으로 처방을 내리죠.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처방이어야 해요. 그러나 전수의 개념은 아닙니다. 공유죠. 제가 경험으로 먼저 알게 된 것을 ‘이렇게 할 수도 있다’의 개념으로 공유하는 거예요. 정답은 아니니까요.”
박기태 대표에게 목공은 삶의 일부분이자 취미다. 지난해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작품을 하나 밖에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적어도 일 년에 서너 개는 완성할 계획이다.
“목표가 없으면 삶이 재미없잖아요. 올해는 협업으로 하나, 단독으로 하나 만들려고 해요. 창업 역시 지금은 달리기보다 강을 건너기 위한 돌을 하나하나 놓는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욕심부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우리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해요. 언젠가는 서울을 벗어나 목공을 즐길 수 있는 문화체험장을 만들고 싶은 꿈도 있는데, 내년부터 착공을 시작해 머지않아 완성될 것 같아요. 무일푼으로 창업해 이만큼 왔으니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꼭 요란하게 타올라야만 열정이 아니다. 은근한 열정도 있다.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힘과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심지도 열정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박기태 대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