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의 맥이 살아 숨 쉰다
    윤만걸 대한민국명장(석공예)과 대를 이은 두 아들 윤동천, 윤동훈 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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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도이자
화랑과 귀족의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핀 곳, 경주.
석공은 이곳에서 돌을 만지며 천년 세월을 읽는다.
석조의 문양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으므로.
석조는 그래서 경이롭다고 말하는 경주 석공(石工) 삼부자의 이야기.
글. 김민정 / 사진. 이승훈


손끝으로 역사를 만지며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따라 경주 남산 아래 자리한 석재공장. 희뿌연 연기 사이로 뚝딱뚝딱 돌 깎는 소리가 공간을 메운다. “이야, 돌 더미가 남산만 하네.” 석재공장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의 감탄사는 한결같다. 적재된 돌 틈 사이로 윤만걸 명장이 걸어 나온다. 늠름한 풍채가 자연의 돌과 똑 닮았다. 1980년 5월,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경주에 터를 잡은 그는 어느덧 60대를 바라보는 석공이 되었다.

어언 40년을 돌과 부대끼는 동안 용장사지 삼층석탑, 국사골 삼층석탑, 늠비봉 오층석탑 등 경주의 수많은 문화재가 그의 손을 거쳤다. 울산 정자에서 태어나 서울과 경기도, 전라북도 익산을 오가며 오로지 돌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오던 그에게 경주는 천년 역사의 터전이요, 곳곳이 석조 문화 배움터였다. 그렇게 답사단체인 신라문화동인회를 통해 윤경열 선생과 함께 남산 등지를 돌며 불상과 돌탑, 그 위에 새겨진 문양 등에 심취했다.

그가 석조에 가치를 느낀 건 그 어떤 문화재보다 견고하고 더디기 때문이다. 거센 비바람에 깎이고 닳을지언정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돌이다. 그것으로 몇 천 년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예로,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의 석조에는 화려한 문양들이 가득하다.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석조 문화재를 복원하는 작업이 석공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이유다.
 

“89년도인가 처음 복원사업을 맡았을 때일 거예요. 하루는 남산에 올랐는데 탑 하나가 무언가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않더군요. 본토에서 발굴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거지요. 복원작업을 할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 지역에 녹아드는 돌을 찾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세월의 흐름에 맡기는 거지요.”


이제는 그의 방식이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의 기준이 됐다. 그간 어떤 재료, 즉 돌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지만 그의 방식이 인정을 받으면서 달라졌다. 문화재청의 표준품셈과 표준시방서(공사에 필요한 재료의 종류와 품질 등을 명확하게 기록한 문서)에는 문화재 복원 시에 해당 지역의 재료를 사용하도록 현재 명시되어있다. 대한민국명장(석공예)으로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면 바로 이러한 지침을 세운 것이다.

 


돌과 정(丁)을 벗으로 삼고

그는 열여섯 무렵 친구를 따라 간 경기도의 한 석재공장에서 처음 일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친구는 그의 체격과 성미라면 석공이 제 격이라 했다. 하지만 석공은 때로는 아주 섬세하다. 돌을 자르는 ‘할석’부터가 거칠지만 양면이 있는 일이다.
 

“나무에 결이 있듯이 돌에도 결이 있습니다. 돌쟁이들은 다 알지요. 돌을 결에 따라 쐐기를 박아 균열시킨 뒤에 틈을 벌려 정으로 치는 작업을 할석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모두 석공의 손을 거쳤지요. 요즘 기계가 아무리 정교하다고 하더라도 그 손맛을 따라갈 재간은 없어요.”
 

돌을 내리쳤을 때 단단한 것이 ‘쩍’하고 갈라질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다음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돌에 혼을 불어넣는 게 석공의 몫이다. 그 매력에 빠져 40대에는 겁 없이 뭐든 해냈고 완벽했다. 삶이 팍팍했던 시절, 일찍이 밥벌이를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으니 그 실력만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50대가 되고 60대가 되니 문화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어깨가 무거워진다. 돌 하나도 허투루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1995년 제6대 대한민국명장(석공예)으로서 이름을 올린 것도 크다. 그는 1992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수상과 더불어서 문화재수리기능자, 석공예기능사, 석공기능사 등 각종 석조부문 자격을 갖췄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는 젊은 석공들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렇게 1994년 한국직업전문훈련교사 수련과정을 거친 것이 명장으로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뒤이어 하려는 젊은이들이 없더라고. 정말 없어요. 그런데 후대에 우리 문화재를 잘 물려주려면 석공이라는 게 꼭 필요한 일이니까.”

요즘 석공을 하려는 이들은 드물다. 젊은 장정도 망치질 하루면 혼이 쏙 빠진다. 점차 이름을 올릴 만한 석공이 줄어드는 때에 고맙게도 두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20대 초중반 때 줄곧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어요. 그런데 아버지 하는 일을 돕다보니 어느새 제 길이 되더군요. 대학에서 도면이나 기계를 다룬 경험들이 도움이 됩니다.”

석공 삼부자는 경주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경주에 자리한 월정교 복원 작업은 당시 군에서 휴가를 나온 둘째 동훈 씨까지 삼부자가 참여해 완성한 것으로 삼부자에게는 유독 훈훈하고 기억에 남는 일화다. 석공이자 아버지인 그에게는 돌과 망치와 정(丁)과 더불어 자신을 이해하는 두 아들이 평생의 친구다.


두 아들의 스승으로 살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건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예요. 같은 작품을 두 번하는 경우는 잘 없는데 단국대학교에서 의뢰한 것이 맘에 들었는지 다른 대학교에서도 의뢰가 들어왔어요.”

둘째 동훈 씨는 이러한 복제품은 문화재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진품은 훼손의 우려가 있어 복제품을 두어 시민들에게 개방한다. “요즘은 3D프린터로 모형을 제작한 뒤에 다시 1:1
크기로 제작해요. 납품할 때에는 공정과정을 증빙하기 위해서 정확한 기록을 남기죠.”

두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 방식은 조금 다르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문화재 복원을 공부할 정도다. 그런 데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는 평생을 석공을 하시며 살아온 분이신데 현장보다 이론이 더 대우받을 때가 많아요. 아들 입장에서는 너무 안타까운 거죠. 아버지가 현장에서 40여 년간 노하우를 쌓았다면 형과 저는 문화재 제작공정이나 복원에 관한 이론까지도 배워두고자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지나온 세월을 고집할 법도 하지만 두 아들과의 작업에 스스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의 스승이자 또 제자다.

“모든 일은 10년 이상 연마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젊은이들 하는 얘기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어요. 작업하다가 두 아들이 ‘아버지!’하는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작업하면 안 된다 꾸짖는 소립니다. 그러면 군말 없이 아들들 하는 얘기를 듣고 작업하기도 하고.”

첫째 동천 씨는 아버지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기계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손맛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가장 닮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만든 작품만이 가진 느낌이랄까요. 그 느낌을 배우고 싶어요. 거기다 돌로 만든 것은 시간과 공간마다 다 달라요. 어느 작품도 같은 게 없어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돌 만지는 재미’죠.”

삼부자는 그간 참여한 복원사업도 많지만 앞으로 해내야 할 일도 많다. 경주를 비롯해 어떤 곳이든 문화재를 전통방식대로 복원해내겠다는 것이다. 윤만걸 명장은 또 한 가지 목표를 내놓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일본, 미국, 유럽 등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 복원에 힘을 쏟고자 한다. 가히 명장다운 포부다. 40여 년간 신라의 옛 문화를 간직한 경주를 보듬는 것에서 나아가 외국에 흩어져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경외심을 지녔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작업장 한 편, 문화재 복원에 관한 서적과 수많은 상패들이 한 데 어우러진 공간에 들어서본다. 벽면에 걸린 문구가 인상 깊다. ‘혼이 담긴 석공의 솜씨에 돌은 맥이 살아 숨을 쉰다.’ 그리고 창문 너머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망치질이 흥겹다. 경주 석공 삼부자의 이야기는 오늘도 끝이 없다.

 

업데이트 2016-06-2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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