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서 평면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다시 공간으로.
실과 바늘로 창조한 이승희 명장의 예술 세계는 섬세하면서도 담대하다.
독창적인 시선, 독보적인 재능으로 우리나라 전통 자수를 재해석하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바늘구멍만큼 소소하고 일생만큼 거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 정은주 / 사진. 이성원
뭐든 해내고야 마는 야무진 손끝
곱디곱던 손에 세월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한 땀 한 땀 일궈온 생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자그마한 손으로 처음 바늘을 잡았던 게 언제인지. 45년을 아득하게 거슬러 올라, 이승희 명장은 철없던 소녀와 다시금 조우한다.
“한마디로 말괄량이었어요.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탁구며 야구를 하고, 핫팬츠 입고 사이클도 엄청 탔죠. 중학교 때였는데, 어머니께서 자수를 배워보라 권해 그러겠다고 했어요. 맞은편 집에 자수 하는 언니가 있었거든요. 워낙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고, 또 그때는 공부에도 흥미가 생기질 않아 선뜻 시작했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과거에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가난이 투영되곤했다. 하지만 이승희 명장은 정반대였다. 어릴 때부터 미학적 취미를 가진 어머니 곁에서 온갖 아름다운 것, 고급스러운 것들을 눈에 담으며 자랐다. 아마도 그러한 경험들이 알게 모르게 축적됐을 터. 직관적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걸 발견해내는 탁월한 감은 그때도 남달랐다. 게다가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은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대량생산을 위해 분업화로 자수가 이루어지던 1970년대, 예술이라기보다 산업자수라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서 이승희 명장이 예술에 대한 갈증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이후 일본자수 기술을 익히며 1년 정도를 보냈다.
습득력은 뛰어나도 남들보다 진도는 느렸다. 적당히 끄덕끄덕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기술을 완벽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고 당돌한 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참 야무지고 단단한 청춘이었다.
“남들과 비교해서 뒤지는 게 정말 싫었던 때에요. 그래서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자존감이 높아서라기보다 자존심이 세서였겠죠. 당시는 그게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좀 변했어요. 저는 저의 목표에만 집중할 뿐 누군가와의 경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한 끝없는 노력
그의 젊은 시절은 치열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했다. 부모님이 편찮으시면서 하루아침에 소녀가장이 됐고, 작품 하는 곳에 17년 정도 몸담으며 말로 다 못할 힘듦도 겪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건 어떤 상황에서건 자수를 즐기는 마음이 퇴색되지 않았다는 거다.
청춘의 열정은 무모할 만큼 순수했다. 그리고 그 순수함을 무기로 이승희 명장은 지치지 않고 성장을 거듭했다.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건 밤낮을 불문하고 될 때까지 연습했다. 몸이 고된 것보다 생각한 걸 실행할 수 있다는 기쁨, 작업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희열이 몇 배는 컸다. 그러면서 잠을 줄여 미술학원에 다니고, 주말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 공부를 했으며, 서른둘이 되던 해에는 미술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50세 때는 대학원에서 전통공예도 공부했다.
“바늘을 꽂기 전에 수틀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보통은 먹지를 사용하는데, 그렇다 보니 100% 저만의 표현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림을 배워 전통적인 밑그림을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민화 재해석에 포커스를 두고 그림을 그렸어요. 주변에서 디자인과나 공예과를 추천했지만 서양화과를 택한 건 그런 이유예요.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화 할 건지를 고민했거든요.”
덕분에 이승희 명장의 작품들 중에는 전통자수를 뛰어 넘는 새로운 느낌의 것들이 많다. 우리의 민담을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하는 데 오랜 시간 고민과 노력을 쏟아 부은 결과다. 독자적인 작업을 하면서 예술적 가치는 정점을 찍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에 찬사가 쏟아졌다. 섬유예술 공부를 위해 떠난 베를린에서는 독일 정부 지원으로 초대전을 열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지난 2007년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 이승희 명장. 올해 초에는 ‘올해의 대한민국명장’에 선정되는 영예도 누렸다.
“어릴 때부터 1년, 5년, 10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걸 습관처럼 해오고 있어요. 매년 큰 것 두 개 정도를 정해 꼭 이루려고 노력도 하고요. 즐거움을 위한 일에는 절대 주저하지 않는 타입이라 남들은 저를 보고 자유로운 영혼이라 말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을 구속시키는 타입이에요. 다만 그 즐거움 안에 자수도 포함된다는 것뿐이에요.”
명장으로서 지켜온 뚜렷한 철학
자수는 시간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들 한다. 몇 번의 붓 터치만으로도 색이 표현되는 그림과 달리 한 땀 한 땀 수놓는 정성이 수만 번 반복되어야만 비로소 색과 형태가 발현된다. 소재에 따라 바늘 굵기와 실의 색은 물론 실이 가는 방향도 다르게 해야 한다. 고도의 숙련기술이 필요한 분야. 손끝이 섬세하다고 모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조형미나 색감을 보는 눈은 작품의 완성도와 직결된다.
자수를 ‘섬유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승희 명장은 이러한 자수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바늘구멍만큼의 몰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침묵을 즐길 수 있어야만 자수의 매력에 빠져드는 게 가능하다고.
“온전히 몰입하려면 한두 시간으로는 부족해요. 너덧 시간 쯤 지나면 오직 침묵만 있는 시간이 오는데요. 그쯤 되면 내가 아니라 나의 영혼이 바늘을 꽂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시간의 개념이 무의미해지죠.”
그렇다고 손만 움직이는 건 단순노동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그. 정성과 영혼을 실어야만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깃든다. 더불어 자신만의 시각을 더하는 작업도 필수적이기에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앞에서, 옆에서, 뒤집어서도 보며 사고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렇게 불쑥 영감이 찾아들면 다시금 새로운 작업에 몰두한다.
이승희 명장은 이러한 자수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이 있다. 특히 전통자수라고 하면 좁게만 인식되는 게 아쉽다고. 그래서 ‘아름다운 자수’라는 매뉴얼 책을 내고, 재능기부로 대중들에게 자수의 아름다움을 전하기도 한다.
“물감이 주지 못하는 실의 따뜻함이 자수에는 있어요. 그래서 어떤 화려한 색을 조합해도 포근함이 마음에 와 닿아요. 특히 과거 선조들의 작품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아지는데요. 수는 얼기설기해도 마음만은 올올이 남아 있거든요. 정이 느껴지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요. 시대는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요. 저는 어설프게 작품하면서 명예만 좇는건 싫어요. 아버지의 조언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마음이 담긴 작품 활동을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