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정 / 사진. 이승훈
3代째 이어온 다르지만 같은 꿈
우리나라 유일의 국산망치공장.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사무실에는 바로 옆 망치공장의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다. 이곳에 냉방시설 하나 없는 이유인 즉, 공장 식구들과 동등하게 일하고자 하기 위함이라 말하는 그는 3代째 망치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이 건우 영창단조공업 대표다. 13여 년 전 망치사업을 시작한 이래,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온 두 손과 거친 목소리에 그의 열정이 짙게 뱄다.
이곳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망치 공장이 처음 문을 연건 1965년, 그의 조부는 손재 주 좋은 기술자였다.
대패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기술개발에 뛰어들었고, 그 중에서도 망치가 단연 으뜸이었다. 망치라 하면 대장간에서 만들어내는 투박한 모양의 망치를 떠올 리던 시절, 처음으로 프레스기를 이용해 정형화된 망치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후, 이 대표의 아버지가 그 뒤를 이었고 이제는 이 대표가 그 명맥 을 이어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이리로 가도 망치, 저리로 가도 망치였어요. 눈에 보이는 게 망치인지라 의도하지 않아도 망치 공정에서부터 거래처 관리하는 법까지, 알게 모르게 몸에 밴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때, 제가 ‘형~’ 하며 따르던 분들도 함께 일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자산이죠. 망치에 대한 내공은 그때부터 쌓여온 거예요.”
다른 이들과 출발선이 조금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기반은 닦인 상태였으므로. 허나 그것만으로 열정을 논할 수는 없다. 부모님의 뒤를 잇는 건 그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망치사업 으로 줄곧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죽어도 망치는 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서 전자공 학을 전공할 정도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도 했다. 내키지 않으면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어머니의 뜻을 모른 체 하기가 참 어려웠다.
“공장 거래처 분들은 어머니를 다 여장부라고 했어요. 그만큼 망치에 쏟는 애정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제 눈에는 얼마나 힘들게 사업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거예요. ‘망치공장이 문을 닫으면 어머니의 한 평생이 허무해질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해보기로 결심했죠. 그 때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어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자부심
그가 처음 망치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매출 장부였다. 사업을 물려받았으니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것도 잠시, 매출액과 쌓인 빚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가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니며 도움을 청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때 깜짝 놀랐어요. 나름대로는 기대하며 뚜껑을 열었는데 웬 걸, 빚만 잔뜩 짊어진 채 그저 오르락내리락 사명감으로 이어온 사업이더군요. 공장 구석구석 구부러진 곳, 꺾인 곳, 빈틈으로 새어나가는 돈들…. 내가 구원투수라 생각하며 뛰어들었지만 메워야 할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니었어요.
” 노력 없이 얻는 이득이란 없다. 반드시 책임감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직원들은 마치 하늘에 세 개의 태양이 있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이 대표. 그만큼 사업을 이끌어가는 데 서로 의견 차가 컸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망치를 쥐었다. 아들이지만 사업을 잇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그리하여 주말이면 경영대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폴리텍대학에서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업이 안정을 되찾기까지 1년. 흑자로 올라선 이익이 또 다시 곤두박질치고 오르기를 반복. 그렇게 고군분투하다보니 아이디어가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망치라는 것을 새로이 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마지막 대장간이라는 생각에 남모를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단조는 쇠를 녹여서 모양을 잡는 게 아니라 ‘땅, 땅, 땅’쳐서 모양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틀 안에 놓고 쇳물을 부어 다양한 모양을 내는 ‘주조’와는 그 방식이 전혀 다르죠. 즉, 프레스기로 상하운동으로만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모양에 더욱 신경을 써야해요. 그 대신 프레스기의 압출, 응결을 통해 품질이 훨씬 더 좋아지죠.”
한 때는 중국산 부품을 써서 마진을 남겨볼까도 싶었다. 그러나 그 이윤으로 명예를 위축시키기는 싫었다. 시작한 일에 대한 포부와 뚝심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러다 어떻게 하면 현상유지가 아닌 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사양 산업이라 불리는 망치에 색과 디자인을 입히고, 불특정 다수에게 쓰이는 망치가 아닌 특수한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망치를 개발한 것도 그러한 노력에서다.
“지난해에는 조선소 용접에 쓰이는 특수망치를 납품했어요. 그때 매출이 또 한 번 껑충 뛰었죠. 이렇게 망치라는 것이 과연 못 박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가장 많이 했어요. 그러다 이번에 개발한 것이 뭐냐면 ‘정망치’예요. 석공들이 정과 망치를 쓸 때 손을 많이 다쳐요. 그렇다면 망치에 손잡이가 있으면 정을 쳐도 손 다칠 일이 없겠다 하면서 개발한 거예요. 이렇게 쓰임새가 다른 망치를 만들어 나가는 게 하나의 돌파구죠.”
그렇게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한 디자인 특허만 25개, 일반특허 1개, 상표등록 4건. 이쯤 되면 순전히 아버지, 어머니 뒤를 이은 열정만은 아니다.
무모하리만큼 흠뻑 뛰어들어
그래서 그는 시작할 때는 ‘왜’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라야 가능하다. 열정이야말로 끊임없는 인내라고.
“어떤 일을 한결같이 이끌어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저도 사업이라 하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비가 오는 대로. 책임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꽃길과 가시밭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글쎄요. 저는 무모하더라도 가시밭길을 걸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꽃길을 두고 가시밭길이라. 성공가도를 달리는 이의 현실감 없는 조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시밭길에 당당히 한 표 던진다
“지금 제 나이 39세, 이제 겨우 마흔이죠. 저도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이고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작년이면 올해보다는 경기가 좋았으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웃음) 주변을 보면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분들은 정말 무모하리만큼 흠뻑 뛰어들더라고요. 물론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턱대고 가시밭길을 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에요. 공정한 경쟁을 하기에도 여의치 않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모두가 가려는 편한 길 대신에 가시밭 길을 걸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엔 경쟁력이 됩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국산 망치에 대한 자부심, 사업가로서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 제 자리를 지키는 직원들에 대한 고마움. 모든 게 이 대표의 원동력이다. 그는 사양 산업이라고 불리는 곳에도 ‘돌파구’는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그걸 조금씩 증명해내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개발해 온 망치 종류만 50여종, 최근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어머니의 이니셜을 담은 프리미엄 브랜드 ‘BHS’, 더 프리미엄 브랜드 ‘토르’ 등 자체 브랜드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를 전 세계에 수출하고자 하는 꿈도 있다. 지금처럼 탄탄한 기술만 갖춘다면 수출 활로를 모색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확신이 있다. 죽어도 하기 싫었던 일에 사명감을 갖고 뛰어들기까지….
그도 망치처럼 단단하고 여물어지는 길 위에 있다. 그저 본인이 가치 있다고 선택한 일에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 그리고 끝까지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제대로 된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