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담대해져도 괜찮다.
김민정 교수처럼.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정적인 인생, 제대로 즐기는 법을 알기에 지치지 않는 인생은 꼭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27년 동안 미용 분야에 몸담으며 성공을 거머쥔 이 시대의 멘토를 만나본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 그게 바로 능력
애쓴다고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애쓰지 않아도 술술 풀리는 일도 있다. 후자의 경우 ‘즐겨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또 ‘재능’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김민정 교수는 이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경우다. 긍정적인 성격 덕에 웬만한 고비는 고비로 여기지도 않았고, 미용실을 운영한 어머니 곁에서 어릴 때부터 미용에 대한 감을 동물적으로 익혔다.
사람들은 ‘타고 났다’고들 했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처음부터 머리 만지는 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기에. 미용실을 놀이터 삼아 자랐고, 조금 커서는 틈틈이 일손을 거들다 보니 어느새 미용은 일상이 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고 할까. 어머니가 진로로 미용을 권유했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민정 교수가 제대로 미용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다. 특성화 고등학교도, 대학에 미용 관련 학과도 없던 시절이다.
“요즘은 미용을 배울 방법이 다양하지만 당시는 미용학원이나 직업학교가 최선의 대안이었어요. 그렇게 실력을 키우다 친구의 권유로 기능올림픽에 나가게 됐어요. 스무 살 때 준비를 시작해 첫 번째는 탈락했고, 스물두 살 때 재도전 해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땄죠. 그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는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이 남들보다 몇 배는 큰 소녀였다. 그래서 ‘한 가지 일만 하고 살았던 적이 없다’라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생긴 전문대 미용과에 1회 입학생으로 공부할 때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시어머니가 된 최영희 선생에게서 기술을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생각에 매주 동과 서를 오갔다.
“신문에 교수 채용 공고가 난 걸 보고 과가 생긴 걸 알았어요. 그래서 바로 입학을 결심했죠. 학교가 강릉이라 어머니가 월요일 새벽 5시마다 미용실이 있는 동두천으로 픽업을 오셨어요. 그길로 저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주면 강릉으로 가 수업을 들었죠. 그러다 금요일에 다시 집이 있는 사당으로, 주말에는 미용실이 있는 동두천으로 가서 기술을 익혔어요.”
몸이 고되긴 해도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 여겼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에너지가 샘솟았다. 그야말로 ‘열정’이라는 한마디로 모든게 대변되는 청춘이었다.
현재를 있게 한 원동력, 실천의 가치
살아보니 그렇다. 삶을 호락호락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나 싶다. 김민정 교수는 그래서 하루하루를 즐겼다. 계단 오르듯 차근차근 인생을 올랐다. 산뜻한 그 걸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랫동안 미용을 하면서 항상 지켜온 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이에요. 불평할 이유가 없죠. 제가 스스로 선택한 제 길인 걸요. 인생은 시작도 끝도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주어져요. 최선의 선택을 했다면 후회 없이 나가야 해요. 그리고 내재된 최고의 가치를 발견해내야죠.”
미용을 시작한 지 어느덧 27년. 거침없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돌아보니 아래가 까마득하다. 긴 세월 오롯이 몰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물론 몸은 여전히 바쁘다. 교수라는 직함 외에도 사단법인 국제기능올림픽 선수협회 부회장, 전국기능경기대회 집행본부위원 등 몸담고 있는 일이 한 둘이 아닌 까닭이다.
요즘은 일학습병행제 프로그램 개발과 지난 2014년에 개발한 헤어미용 NCS 개정작업에 참여 중인 김민정 교수. 특히 NCS는 학교 수업의 기반으로 쓰이고 기업에서도 활용되기 때문에 책임감이 크다고 말한다. 아무리 바빠도 정보 수집이나 자기계발에 소홀하지 않는 건 그런 이유다.
“요즘은 깨어있지 않고 열려있지 않으면 뒤쳐질 수 밖에 없어요. 제도 등이 너무 빨리 바뀌거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시청이나 공단 등의 홈페이지를 모니터링 하면서 변화를 체크해요. 도움될 만한 정보는 공유하고요. 어떻게 보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상상만 해서는 의미가 없잖아요. 실행해야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애쓰지 않아도 술술 풀리는 일도 있다. 후자의 경우 ‘즐겨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또 ‘재능’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김민정 교수는 이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경우다. 긍정적인 성격 덕에 웬만한 고비는 고비로 여기지도 않았고, 미용실을 운영한 어머니 곁에서 어릴 때부터 미용에 대한 감을 동물적으로 익혔다.
사람들은 ‘타고 났다’고들 했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처음부터 머리 만지는 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기에. 미용실을 놀이터 삼아 자랐고, 조금 커서는 틈틈이 일손을 거들다 보니 어느새 미용은 일상이 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고 할까. 어머니가 진로로 미용을 권유했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민정 교수가 제대로 미용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다. 특성화 고등학교도, 대학에 미용 관련 학과도 없던 시절이다.
“요즘은 미용을 배울 방법이 다양하지만 당시는 미용학원이나 직업학교가 최선의 대안이었어요. 그렇게 실력을 키우다 친구의 권유로 기능올림픽에 나가게 됐어요. 스무 살 때 준비를 시작해 첫 번째는 탈락했고, 스물두 살 때 재도전 해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땄죠. 그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는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이 남들보다 몇 배는 큰 소녀였다. 그래서 ‘한 가지 일만 하고 살았던 적이 없다’라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생긴 전문대 미용과에 1회 입학생으로 공부할 때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시어머니가 된 최영희 선생에게서 기술을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생각에 매주 동과 서를 오갔다.
“신문에 교수 채용 공고가 난 걸 보고 과가 생긴 걸 알았어요. 그래서 바로 입학을 결심했죠. 학교가 강릉이라 어머니가 월요일 새벽 5시마다 미용실이 있는 동두천으로 픽업을 오셨어요. 그길로 저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주면 강릉으로 가 수업을 들었죠. 그러다 금요일에 다시 집이 있는 사당으로, 주말에는 미용실이 있는 동두천으로 가서 기술을 익혔어요.”
몸이 고되긴 해도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 여겼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에너지가 샘솟았다. 그야말로 ‘열정’이라는 한마디로 모든게 대변되는 청춘이었다.
현재를 있게 한 원동력, 실천의 가치
살아보니 그렇다. 삶을 호락호락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나 싶다. 김민정 교수는 그래서 하루하루를 즐겼다. 계단 오르듯 차근차근 인생을 올랐다. 산뜻한 그 걸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랫동안 미용을 하면서 항상 지켜온 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이에요. 불평할 이유가 없죠. 제가 스스로 선택한 제 길인 걸요. 인생은 시작도 끝도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주어져요. 최선의 선택을 했다면 후회 없이 나가야 해요. 그리고 내재된 최고의 가치를 발견해내야죠.”
미용을 시작한 지 어느덧 27년. 거침없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돌아보니 아래가 까마득하다. 긴 세월 오롯이 몰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물론 몸은 여전히 바쁘다. 교수라는 직함 외에도 사단법인 국제기능올림픽 선수협회 부회장, 전국기능경기대회 집행본부위원 등 몸담고 있는 일이 한 둘이 아닌 까닭이다.
요즘은 일학습병행제 프로그램 개발과 지난 2014년에 개발한 헤어미용 NCS 개정작업에 참여 중인 김민정 교수. 특히 NCS는 학교 수업의 기반으로 쓰이고 기업에서도 활용되기 때문에 책임감이 크다고 말한다. 아무리 바빠도 정보 수집이나 자기계발에 소홀하지 않는 건 그런 이유다.
“요즘은 깨어있지 않고 열려있지 않으면 뒤쳐질 수 밖에 없어요. 제도 등이 너무 빨리 바뀌거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시청이나 공단 등의 홈페이지를 모니터링 하면서 변화를 체크해요. 도움될 만한 정보는 공유하고요. 어떻게 보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상상만 해서는 의미가 없잖아요. 실행해야죠.”
미용인으로서의 사명감이자 낙, 인재 양성
김민정 교수 가족은 미용 집안이다. 어머니가 미용실을 운영했었고, 시어머니 최영희 선생 역시 대한 미용사중앙회 중앙회장으로서 여전히 현업에 있다.
동서도 헤어디자이너, 김민정 교수의 딸도 엄마의 뒤를 잇겠다고 나섰다.
“딸은 제가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녀서인지 미용을 진로로 택했어요.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메달도 땄을 만큼 열심이에요. 미용 집안이라, 자연스럽게 이 일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즐기는 태도는 어떤 일에 몰두하기 위한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하루하루 매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딸을 포함한 미래의 숙련기술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항상 조언한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점점이 모여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만들기 때문에 매 순간 충실해야 한다고.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헤어디자인 직종 국제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인 김민정 교수. 서른다섯 살 때가 처음이었으니 그가 인재양성에 나선 지도 벌써 12년째다.
“국제심사위원치고는 너무 젊은 나이에 제안을 받아서 잘 할 수 있을까, 이 다음에는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나 싶은 걱정이 있었어요. 고민 끝에 시작했는데, 감사하게도 처음 같이 간 친구가 동메달, 다음 출전 때는 금메달을 수상해 자신감이 생겼죠. 그리고 인재양성에 대한 목표도 확고해졌고요. 제가 받은 것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선수와 호흡을 맞춰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지만 그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키우는 일이 즐겁다. 그 마음은 대학 강단에 설 때도 마찬가지. 때문에 국가대표로 대회에 출전했던 경험, 평생 동안 익힌 미용 기술과 노하우, 좋아하는 일을 잘 하는 일로 만들 수 있었던 삶의 철학들을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멋모르는 도전으로 고군분투했던 자신과 달리 후배들은 보다 전략적으로 꿈에 다가섰으면 하는 진심을 담아. 더불어 그 역시 완벽에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미용 한길만 보고 내달렸던 그때처럼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