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등정, 아마존 정글 마라톤 완주, 미대륙 자전거 횡단 그리고 영화 제작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숱한 고생을 스스로 자초해 온 청년 이동진은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가을부터는 미국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조종사로의 꿈에 다가설 예정이라는 그.
도전만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임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글. 김혜민 / 사진. 이승훈
나를 일깨워 준 건 변화에 대한 지독한 갈증
시작은 변화에 대한 절박함이었다.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학창시절을 지우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대입 실패로부터 시작됐다.
“처음으로 무언가에 죽기 살기로 덤볐어요. 제대로 공부해보자 싶었죠. 10개월 동안 재수를 하며 독한 마음으로 하루 17시간씩 공부했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정말 되더라고요. 물론 제가 꿈꾸던 곳은 못 갔지만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항공대학교에 지원했는데, 당시 학교 측에서 시력이 나쁘면 조종사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규정이 바뀌었다고 들었지만요. 그게 제 인생 최고의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조종사가 아닌 길이었기에 제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한 다양한 도전에 임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후 건축공학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스스로의 소심함을 지워내기 위해 그동안 전혀 해볼 생각도 못했던 일들에 과감히 도전하기 시작했다. 뮤지컬 동아리 활동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가 하면, 마라톤과 철인3종경기대회에 출전하여 전 코스를 완주해냈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고통스러운 훈련과정도 꿋꿋이 소화해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스스로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그런 덕분일 것이다. 매 순간 명분을 갖고 시작한 도전이 다시 그 다음 도전을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히말라야 등반에 선뜻 도전하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전역하기 몇 달 전, ‘한국청소년 오지탐사대’ 히말라야 원정대에 지원했던 것이 합격한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더 험난했던 히말라야. 20여 일간 5,800m를 등정하는 동안 함께 버텨오던 몇몇 동료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삶이 얼마나 유한한 것인지 체감되던 순간이었다. 그 슬픔은 이후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길지 않은 인생, 기왕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 하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정글과의 사투를 통해 깨우친 도전의 가치
도전은 계속 이어졌다. 국가대표 배드민턴 선수들을 기르는 감독을 찾아가 자신이 배드민턴을 쳐야하는 이유에 대해 설득한 끝에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 때도 있었다. 유년 시절의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며 내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결과로 5개월 만에 정식 선수로 거듭나긴 했지만, 이내 그는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첫 실패였다.
“제 도전이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안 되는 것도 많았죠. 다만 안 되는 건 빨리 잊으려 했어요. 그 시간에 되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잖아요.”
이렇게 혼란스러움을 극복한 그는 곧 새로운 도전을시작했다. 이름하야 ‘아마존 정글 마라톤 대회.’ 하지만 아마존 정글을 뛰어다닌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도 같다. 망설여졌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마음을 굳혔다.
경비는 아시아나항공의 대학생 꿈 실현 프로젝트와 모교인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장학금을 통해 해결했고, 도전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 ‘울진-독도 240km 33인 릴레이 수영’에 지원하여 기초체력을 단련시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에서의 마라톤은 예상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사투였다. 매일 정글, 밀림, 아마존 강을 뛰어 넘으며 정해진 구간을 제한시간 내에 통과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발톱 8개가 빠지는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진통제를 먹어가며 견디던 그는 끝내 완주에 성공했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100만 원도 채 남지 않은 여비를 가지고 다시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 반대편 LA를 목적지로 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영어도 잘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 난 사 람 들 의 도 움 을 받 으 며 마 침 내 총 6,000km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을 횡단하며 생전 처음 보는 분들의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 은혜를 꼭 갚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그 분들을 통해 경험이라는 자산을 쌓았으니,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마땅한 거예요. 소년원에 있는 친구들에게 강의를 하게 된 건 그래서예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미래를 향한 비행은 이제야 시작됐다
다시 한국.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이전과는 완전 달라져 있었다. 그는 강연무대, 신문기고, 각종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생생한 모험기를 전하는가 하면 본인 이름으로 책도 출판하게 됐다. 또 아시아나항공의 CF모델이 되었으며, 도전의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인재상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화려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간의 행적이 워낙 특이하다보니 주변에선 취업은 다했다며 부러워했어요. 하지만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죠. 이대로 취업을 해야 할지 아니면 내 꿈을 찾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답을 찾고 싶었어요. 문득 몽골의 대초원에서 칭기즈칸처럼 말을 타고 대륙을 달리며 나 자신과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원하는 답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 『고삐』는 그때 탄생했어요.”
이 여정이 자신과 같이 중요한 선택을 앞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가 직접 출연하고 제작했다. 물론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탓에 주변의 도움도 많이 받았단다. 아직 배급사를 찾지못해 시사회에 그치긴 했지만 관객의 절반 이상이 눈물을 터뜨릴 정도로 반응이 좋았기에 언젠가는 개봉되리라 확신한다고. 지금 그는 두 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몽골이 아닌 미국에서 진행된다.
이번에도 주연은 역시 이동진. 그의 오랜 숙원이었던 비행조종사가 되는 과정이 주 내용이다. 언뜻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지난 6-7년이 존재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미국 비행학교 입학을 위해 협상을 해야 했어요. 3개주의 10개 비행학교를 찾아가 대표님들을 만났죠. 비행학교 학비를 지원받는 대신 저는 영화제작자이니까 그 과정을 영화로 담아 학교를 홍보해 주겠다고 협상을 제안했어요. 주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렸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되는 거니까요.”
지난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간의 도전을 인정받아 그는 결국 협상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돌아올 청년 이동진. 앞으로 UN과 함께 전 세계 100개 기업들과의 세계일주 계획을 구상중이라는 그의 미래 활주로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