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기공학을 자동차 부품 기술로 잇기까지
    손영태 태광공업(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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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신 기계를 마주해야 했던 열여섯의 앳된 소년.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오전에 기술을 숙련하며 일을 끝내고 나면,
저녁에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렵게 견뎌 온 시간은 고스란히 그의 손으로 녹아들어 섬세한 기술력이 탄생했고,
이를 발판 삼아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의 끝에 지금의 손영태 회장이 있다.
글. 김혜민 / 사진. 이승훈


치기공학으로 입문한 기술인의 길

자동차 램프, 시트 등의 자동차 부품을 제조하여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과 거래하고 있는 태광공업(주). 1993년, 설레는 마음을 안고 법인 설립을 했으니 벌써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손영태 회장에겐 여전히 어제 있었던 일인 듯 선명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환희에 찬 순간을.

“시대가 다 그러했으니 저 역시 참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를 다닐 나이에 벌써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때 배운 것이 치기공술입니다. 언뜻 지금 하는 일과 별개로 보이겠지만, 크게 보면 그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죠.”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스승 아래서 혹독한 시간을 보냈던 나날들. 월급은 고사하고 잠자리조차 편치 않은 생활이 이어졌지만 배움에 대한 의지는 완고했다. 생계를 위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늦깎이 중학생으로나마 야간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독하게 공부했다. 끈기며 열정 하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성미 덕분이었을 테다.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치기공사로 열심히 일하던 그. 하지만 문득 더 넓은 세상에서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물론 치기공사로 안정된 생활을 꾸리고 있던 시기였기에 모험에 대한 생각은 그저 상상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 그때 제가 일하던 치과에 치료 받으러 자주 오시는 분이 있었는데, 자동차 부품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던 사장님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태도가 마음에 드셨는지, 함께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셨지요. 제가 가진 섬세한 기술을 사용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며 말이죠.”

주변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러나 망설임도 잠시, 결국 그는 방향을 틀기로 결심했다. 자동차부품 회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섬세한 치기공 기술로 탄생시킨
자동차 부품 개발

전직 후 만난 세상은 새로웠다. 기계소리로 정신없는 공장의 모습이 그랬고, 해외의 굵직한 자동차 전시회에서 보이는 자동차부품의 변화 양상이 그랬다. 당시 그가 다니던 회사는 주로 자동차 시트커버를 만들었기 때문에 재봉틀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기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제조기술의 발달과 함께 자동차 부품 역시 쇠에서 플라스틱 소재로 옮겨가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스승에게 어렵게 배운 치기공술이 다시금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출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더군요, 플라스틱 사출은 치기공술과 비슷한 면이 많으니까요. 쇠 금형에 플라스틱을 녹여서 찍어내는 기술엔 0.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치기공도 마찬가지에요. 각 개인의 구강구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엄청나게 불편하기 때문에 굉장히 세심하고 정밀한 가공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의 강력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사출사업에 대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건 바로 그때. 비록 자본이 넉넉지 않아 울산을 떠나 이 곳 경주 외동읍에 터전을 잡긴 했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면 다 이곳과 인연이 닿아서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타지 출신으로는 최초로 경주 16, 17대 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역임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울산JC 및 황룡라이온스클럽을 비롯해 경주 상공회의소 회장직에 있었던 것도 다 그 연장선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부문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경제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그곳에서 앞으로가 기대되는 기회의 땅을 많이 발견하고 돌아왔으니 모두 귀중한 경험입니다. 이후 이명박 정부의 초대 창조적 동반성장실무위원으로 활동하여 대통령산업포장을 수여하기도 했지요.”

그는 기술만큼이나 사람을 중시하고 관계를 소중히 한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보다는 주변에 사람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것이 그의 지론. 그렇게 베풀고 살아온 덕분인지 외환위기, 금융위기가 거쳐가는 어려운 기간에도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단다. 부도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경주조선 컨트리클럽을 인수해(現 신라컨트리클럽) 시재 출연은 물론 법인설립, 대구은행과의 MOU 체결 등을 통해 경영을 정상화 시킨 것도 그 즈음이다. 물론 경영 정상화 이후엔 바로 경영에서 물러났다. 종신명예회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말이다.


배우는 사람만이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출SQ인증서, 품질인증서(PPM), CCM인증서, ISO 14001 및 ISO/TS 16949 등 실력을 검증하는 인증서를 비롯해 중소기업진흥공단 선정 ‘일하기 좋은 으뜸기업’, 신용보증기금 선정 ‘좋은 일자리 기업’, 고용노동부 선정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 등 사내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수상내역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손영태 회장은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가 요즘 집중하는 부문은 직원들을 위한 교육제도 개선. 제대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던 옛 시절을 떠올리면, 직원들만은 최대한 쾌적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단다.

“우리 회사에서도 현재 일학습병행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시행되기 전부터 선배가 직접 가르쳐 주는 비슷한 제도를 사내에서 운영하고 있었지요. 아무래도 직속 선배에게 바로 배울 수 있으면 실력향상은 물론이고 서로 간의 믿음도 돈독해질 테니까요. 최근에는 서라벌대학교와 MOU를 맺었습니다. 출장강의를 통해 직원들이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교육만큼은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회사와 직원이 함께 성장할 때 최대의 시너지를 낼 수 있으니까요.”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전 세계를 무대로 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끊임없는 배움의 자세가 필수라고 이야기하는 그. 함께 공장을 둘러보던 그는 젊은이들이 실력을 기른 후, 국경을 넘어 유망한 시장을 찾아 승부수를 띄운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 이야기했다.

“스펙이 아니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근면하게, 성실하게 실력을 키워나간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업데이트 2016-10-2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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