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으로 돌아간 26시간
    통도사 서운암에서 보낸 힐링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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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였다.’ 스님들이 거주하는 절에 과연 헤어드라이어가 있을까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가,
내가 갈 곳은 본당이 아니라 서운암(瑞雲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든 생각이었다.
공단 조직활성화사업의 일환인‘힐링연수’에 참여하며 잔뜩 들떴던 마음이 조금은 시들해졌던 순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힐링연수가 채워줄 충만한 행복감에 대하여….
글/사진. 박숙희 경기북부지사 직업능력개발팀 과장

금요일 아침,
새벽부터 내리는 비에 우산을 받쳐 든 채 비탈길을 따라 장경각에 오르는 길. 모퉁이를 돌자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뿜어져 나온다.
영취산 산자락이 아지랑이를 피어올리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산수화 한 폭. 그 풍경이 모두의 발걸음을 잡는다.

비 온 뒤 더욱 선명해진 시야에 통도사와 서운암이 들어온다. 우리가 지나온 비탈길 옆 숲 속 연못 가 어딘가에 공작, 거위, 아기 오리, 학이 노닐고 있겠지?
사람을 봐도 겁을 내지 않는 녀석들을 생각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들에겐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하는 경쟁도, 불안도 없기 때문이리라.

장경각은 멋스런 미음(ㅁ)자 형식의 건물로, 성파스님이 1991년부터 2000년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앞 뒤판을 분리해 완성한 16만 도자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대장경 보관 겸 전시공간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입구에서 출구까지 꽤 긴 시간을 굽이굽이 걸어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걷다 건물에 둘러싸인 마당을 보며 섰다. 장경각 지붕을 덮은 기와를 따라 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마에 떨어지는빗방울을 보고, 또 그 소리를 듣는 게 얼마 만인가. 울림이 멋진 공간인 장경각 마당에서 음악회가 열리는 맑은 밤, 옻칠한 기둥 앞에 촛불을 켜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또 와야 할까보다, 마음으로 되뇌며 계단을 천천히 밟아 서운암으로 내려갔다.

운이 좋았던 건지,
1박 2일의 여행 동안 자연은 최적의 날씨를 제공해 주었다. 맑고 밝음 속에서의 어우러짐과 빗속의 낭만을 모두 체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첫날은 종일 눈부신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날씨였다. 쪽물 들인 스카프를 말리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이 제공된 것이다. 젖어있을 땐 분명 초록색이었는데, 활짝 펼쳐 들고 햇볕 아래 바람 쐬며 말려주니 너무나 예쁜, 가을 하늘을 닮은 푸른 쪽빛을드러낸다.

두 번의 염색과 세 번의 건조, 여러 번의 수세(水洗)를 거치니 목에 가을 하늘을 두를 수 있게 된다. 남성들이 더 좋아하는 건, 내가 갖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가 더 행복하다는 증거일지도….

우리가 강의를 듣고 묵은 곳은 스님들의 동안거/하안거를 위해 만들어진 선방과 숙소였다. 안거(安居)는 승려들이 외부와의 출입을 끊고 참선수행에 몰두하는 행사를 말한다. 이곳 서운암 선방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앞마당에 잔디를 깔아놓은 곳이다. 그 잔디밭 위에서 첫날은 사찰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둘째 날은 우중(雨中) 다과를 즐기며 주지스님의 경상도 사투리 섞인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날 뿌릴 비를 안고 있느라 하늘은 별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바람은 숙소를 둘러싼 대나무 사이를 누비며 환영 인사를 건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 풀벌레 소리, 이른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몸이 절로 치유됨을 느꼈다.

어두우니까, 컴퓨터 소리가 없으니까 너무 좋다는 동행의 말처럼, 인공이 멀어지고 자연 그대로의 색과 소리에 가까워진 덕분이리라.



서운암의 명물 중 하나는
1,600개의 된장 항아리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항아리에는 서운암만의 비법으로 만든 된장과 간장이 들어있다. 서운암에는 약 1,600개가, 민가에 있는 된장 공장에는 4,000개가 있는데, 생약재가 첨가되어 약된장으로도 불린단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하얀 모자를 쓴 항아리 모습이 너무 예뻐 전국 각지에서 사진사가 모여들만큼 장관을 이룬다는 이곳. 우리도 그 항아리 앞에서 마지막 추억을 사진 속에 담았다. 항아리 속의 약된장 만큼이나 통도사에서의 시간은 우리 몸과 마음에 든든한 약이 된 듯하다.

시간에 쫓김 없이 마음껏 수다 떨고, 마음껏 침묵할 수 있었던 26시간. 긴 여름을 끝낸 내게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행복했고 또, 추억하는 지금도 행복하다.

 

업데이트 2016-11-0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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