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깔끔한 양복차림의 신사가 걸어간다.
어깨선부터 부드럽게 이어지는 옷매가 자연스럽다.
한동안 시선이 머무르다가 이내 옷을 입은 사람으로 향한다.
옷은 그래서 ‘제대로’여야 한다.
빠르게 사라지는 옷들 사이, 더디고 오래가는 옷을 만드는 이와 만났다.
글. 김민정 / 사진. 이성훈
옷에 들이는 정성
개화기 때 서구와의 직간접적인 문화 교류로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된 양복. 1960년을 기점으로 일상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면서 양복은 바야흐로 전성시대를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복 입는 이들이 한복을 입는 이들의 수를 넘어서게 되면서 수요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 중에서도 서울 중구 소공동은 우리나라 제일가는 양복장이들이 모인 곳이다. 백운현 명장 역시 그곳에서 양복과 인연을 맺었다. 어린 나이에 사내아이가 바느질을 배운 것은 다소 의아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그에게 양복이란 삶의 훈장같은 존재다. 2007년 대한민국 양복명장 선정. 한분야의 공인된 베테랑이 되고 보니 새삼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제가 열다섯에 양복기술자였던 동네아저씨한테 바느질을 배웠어요. 아저씨를 따라 서울로 상경했을때 우연찮게 故모선기 스승님(한국맞춤양복기술협회 명예회장)을 만났죠. 스승님을 만나서 기능경기대회라는 걸 알게 됐고, 스무 살 되던 해, 1975년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까지 획득했어요. 좋은 기술을 제대로 배운 거죠.”
그때 그 시절, 밥벌이에 뛰어든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5년, 10년 쪽잠을 자며 기술을 배웠다. 고수의 노련한 손기술만큼 부러울 것도 없었던 시절, 뭣 모르고 시작한 일에 재미가 들고 길한 인연이 닿아 양복장이로서 명성을 얻기까지, 그 역시도 시작은 아주 미미했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최선’이라는 단어만 떠오를 뿐 거창한 무언가를 덧댈 것도 없었다. 양복도 마찬가지다. 단순하지만 견고한 디테일에 양복의 멋스러움이 숨겨져 있다.
“양복은 겉으론 단순해보이지만 여성복과는 확연히 달라요. 왜냐하면 남자들의 모든 살림살이가 다 들어가거든요. 안경, 손수건, 지갑 같은 것들. 그러니까 양복은 견고하지 않으면 안 돼요. 굉장히 기초가 중요한데다 체촌(신체치수 측정), 패턴(옷본), 봉제, 가봉 등 공정도 많아요. 거기다 결국에는 착용감도 좋아야 하니 양복 만드는 게 어렵다고들 하죠.”
이러한 섬세함을 구현해내기까지 여러 차례 가봉을 거친다. 가봉 후, 옷의 주인이 될 손님이 착장을 하고, 문제되는 부분을 재차 수정한다. 테일러링에 사용되는 원단이 상당히 고가(高價)인지라 가봉을 통해 원단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고, 또 손님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로 옷을 제작하기 위함이다. 그는 아직도 손님에게 옷을 전달할 때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맞춤옷에는 굉장히 까다로워요. 가령 기성복 400만 원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도 맞춤 200만 원은 비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양복을 지을 때는 손님 한 분 한 분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요. 손님에게 전달하는 순간까지도 ‘옷이 제대로 됐을까’ 긴장합니다. 손님들은 그걸 아니까 돈을 지불하더라도 편하고 만족할 수 있는 옷을 찾는 거죠.”
모델리스트, 아이디어와 실무의 조화
이제는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테일러’라는 이름으로 양복을 만드는 백운현 명장. 지난 11월 5일, 서울동대문구 창선동 갤러리에서 열린 제2회 한국모델리스트협회 전시회에 명장의 짤막한 강의가 곁들여졌다. 그가 마이크를 잡는 동안 참석자들로부터 테일러링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둘 중 어떤 옷이 더 잘 만들어진 옷인가요?” “옷은 여유가 있어야 해요. 그걸 패턴이나 봉제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만약 여유 공간이 없으면 옷이 굉장히 불편해져요. 특히 나이가 있는 분들은 젊은 사
람처럼 몸이 반듯하지 않아요. 체형과 연령에 따라 움직임이 확연히 다르죠. 이게 얼마만큼 중요하냐면 패턴에 따라서 브랜드의 매출이 달라질 정도예요. 좋은 옷이란, 이러한 부분을 놓치지 않은 옷이죠.”
그는 현재 한국모델리스트협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이는 조극영 한국모델리스트협회장이 백명장의 고급 테일러링 강의를 들으면서 이어진 끈이다. 여기서 모델리스트란, 디자이너에 의해서 구상된 패턴을 원단의 특성과 디테일을 파악하여 만들어내는 사람을 말한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대중에게 익숙한 디자이너와 달리 조명을 받지 못하는 현실. 조극영 협회장은 패션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전한다.
“디자인 산업에서 모델리스트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해요. ‘아이디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해내기 때문이죠. 외국에서는 이들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기술적으로 완숙하더라도 디자이너보다 ‘하위’개념으로 여기죠. 각자의 영역은 분명하지만 서로 대등한 협력자의 관계로 발전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들이 만드는 작품들은 백운현 명장의 길과는 사뭇 다른 ‘기성복’이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문역할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옷을 만드는 ‘기술자’라는 점에서 상통하는데다 그도 시스템오더(반맞춤양복)를 만들어내는 등 변화의 흐름을 읽기때문. 전시된 작품들 중에는 백명장이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로서 활동하며 만난 학생들의 작품도 여럿이다. 한 달 간 진행된 고급 테일러링 강의에서 두 학생이 열의를 보여 일선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4년간 디자인 실무를 배운다고 하더라도 이론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단 말이죠. 실제 공정은 어떠한지, 옷은 왜 입체감이 있어야 하는지, 이런 건 직접 체득해야 하는 거예요. 배정이, 건엽이 두 친구는 이번 기
회를 통해 현직에 있는 사람들과 작업하면서 학교와는 또 다른 실무를 배웠을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들이 앞으로 학교와 현장의 가교 역할을 많이 할 겁니다.”
기술은 터전이다
그는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외에도 숱한 활동을 해왔다. 20여 년 가까이 일주일에 한 차례씩 진행한 안양교도소 재소자 대상 테일러링 강의와 부족한 강의시간을 메우고자 고안해낸 CD제작 그리고 고급 테일러링 책자 출간까지. 대한민국 양복명장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음에 스스로를 행운아라 부르는 백명장.
“제가 가진 기술로 많은 걸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오른쪽 손가락에 굳은살 보이시죠. 이게 재단하면서 생긴 건데,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아요. 아무래도 지금껏 잘해온 훈장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가
져가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맞춤양복은 비(非)접착식으로 옷감과 옷감이 자연스럽게 맞닿아야 하기 때문에 조금만 각이 틀어져도 이를 살려내지 못한다. 즉, 옷도 손길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온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들인 옷에는 마음도 따라가기 마련.
“운전할 때는 슈트를 뒷좌석 옷걸이에 걸어두고, 식사할 때도 옷에 주름이 지거나 음식물이 흐르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하루는 아들 녀석이 슈트를 한 손에 대강 쥐고 들어오기에 “잘 접어드는 게 좋지 않을
까?”했더니 웃으면서 “그냥 이게 편해요”라고 하더군요. 제 아들 녀석뿐만 아니라 길 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장을 그냥 유니폼처럼 입는다는 느낌을 받아요. 옷에 대한 애정이 예전 같지 않죠.”
뭐든지 빠르게 소비하는 우리는 옷마저도 값 싸게 대량으로 유통되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시대에 살고 있다. ‘느린’ 것에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 맞춤옷에 대한 수요가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
는 느리게 흘러가는 삶에 대한 향수가 역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2013년 제35차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됐을 때, 이태리에서 20대 청년이 대표로 나왔더군요. 교육 체계가 잘 잡혀있으니 해당 경력은 이미 7년~10년이 넘었고요. 안타까운 건 우리나라에는 기술자도 부족하지만 고급 테일러링을 가르칠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다는 거예요. 향후 고급 테일러링을 위한 아카데미를 세워서 청년들에게 사회진출의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명장으로서
해내고 싶은 저의 오랜 꿈이에요.”
세대를 잇는 것과 더불어 앞으로 10년은 족히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을 거라는 명장. 돌이켜보니 양복하기를 참 잘했다고, 항시 옷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명장의 글에 달린 어느 청년의 댓글이 인상 깊다.
“언젠가 학교를 졸업하면 명장님께 꼭 들러서 옷을 맞추고 싶습니다. 장인의 기술은 그 정신에 있다고 생각하는바,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옷 한 벌 있다면 살다가 힘이 들 때 조그마한 힘과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은 ‘터전’이다. 나의 뜻대로 다듬고 만들어나가는 공간이자 쉼터. 오랜 시간, 터전을 가꾼 이들의 모습에는 그래서 멋과 풍미가 있다. 어떤 일을 해야 오래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이처럼 마음 가는 일을 하라, 그리고 견고한 터전으로 삼으라.
백운현 대한민국 양복명장 이력
1972 전국기능경기대회 금메달
1975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
1975 대한민국 동탑산업현장 수훈
1990 한국맞춤양복 패션쇼 청자선 발표
2006 제21회 아시아주문복연맹총회 창조디자인 대상
2006 아시아 주문복 연맹총회 재단·봉제기술 시연
2007 백운현 테일러링 연구소 설립
2007 대한민국 섬유부분 양복명장 선정
2007 기능한국인 선정
2007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선정
2007 국가기술자격검정 출제위원
2007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장 심사위원
2007 한국남성패션문화협회 기술패턴 부회장
2007 대한민국명장회 총무·부회장
2013 제35차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 서울총회 맞춤양복 봉제기술 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