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빛 억새풀 담긴자연의 요람에 들다 - 제주 산굼부리
  • 7065    

여름의 자취가 사라지고 가을색이 짙어졌다. 바람은 선선하고 산책을 즐기기 딱 좋은 시기가 왔다. 억새꽃이 만발해 가을 정취가 물씬 피어오르는 곳이 제주에 있다. 뛰어난 정경으로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받는 산굼부리. 이곳의 일몰과 억새가 함께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 속에서 감성 충만한 휴식시간을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세계에 몇 안 되는 ‘마르형 화구’

산굼부리는 일반적인 분화구와는 다른 마르(maar)형 화구에 해당한다. 마르형 화구는 화산체가 거의 없고 낮은 언덕이 주위를 둘러싼 화구를 말한다. 화산이라기보다는 달의 크레이터처럼 평지가 움푹 팬 듯 보인다. 국내에서는 유일하며 전 세계적으로도 얼마 안 되는 화산지형으로 천연기념물 제263호에 지정되어 있다.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뜻하는 제주 토속어이다. 산굼부리는 말 그대로 ‘산의 분화구’ 인데, 어원적으로는 ‘산신의 주둥이’ 또는 ‘산신이 생기다’란 뜻도 담겨있다. 규모는 바깥 둘레2,700m, 밑 둘레 750m에 화구 전체의 넓이는3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화구 주위 언덕은 낮지만 화구 자체는 한라산 백록담보다 17m 더깊은 132m이다. 워낙 방대한 크기를 자랑해 그깊이가 육안으로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그러나 산굼부리에 입장해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사방이 열려있는 평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게 자연스레 느껴진다. 실제 높이는 웅장한 성채와 다름없지만 답답하거나 막혀있는 느낌은 없다. 든든한 자연이 두 팔로 감싸 안고 보호해주듯 아늑하다. 천천히 거닐면서 사진을 찍거나, 구상나무 숲길에서 피톤치드를 마시며 삼림욕을 즐기는 등 자연 속 힐링을 만끽할 수 있다.


일몰이 스며들고 억새가 빛나는 곳

자연이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가을이지만 산굼부리에 찾아드는 풍경은 조금 더 특별하다. 이맘때쯤 산굼부리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황혼의 계절에 비유되는 가을답게 억새는 하얗게 꽃을 피우고 멋들어진 백발을 자랑한다.

억새의 흰색은 일몰의 순간 진가를 발휘한다. 해질녘 찬란한 금빛을 머금은 억새들이 마음속을 진한 가을의 정감으로 물들인다. 소슬바람이 불면 억새무리는 한 몸이 되어 금빛 물결을 자아낸다. 마치 억새의 바다에 잠겨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산굼부리 안에서 메아리치는 억새의 파도소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고함보다도 속삭이는 말에 더 바싹 귀를 기울이게 되는 법. 억새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근심이 싹 쓸린 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굼부리의 낙조는 사뭇 다른 경치를 선사한다. 빛이 주변으로 퍼져나가지 않고 화구 안으로 들어와 담긴다. 온몸으로 내리쬐는 가을 황혼을 맞으며 자연으로부터 말없는 위안을 받는다. 입장 마감시간인 오후 6시 즈음 들어가면 관람객들의 수가 비교적 적어 멋진 풍경을 독점하는 행운을 누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이 만든 천연 식물원

오름은 비가 오면 화구에 물이 고여 산정호수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산굼부리는 빗물이 화구벽을 통해 전부 바다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 화구 안에 다양한 식물이 군락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연이 스스로 가꾼 정원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산굼부리에서는 먼 옛날 폭발한 화산 더미위에 돋아난 풀과 피어난 꽃을 만나볼 수 있다.

한라산과 비슷한 식물 분포를 보이는 기타 제주지역과는 달리 산굼부리 안에서는 색다른 식물종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내륙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 제주도, 그 가운데서도 더 색다른 제주도를 맛볼 수 있는 셈이다. 억새밭에서는 억새와 함께 보랏빛 용담을 볼 수 있고, 쑥부쟁이, 꽃향유, 자주쓴풀 등 가을 정취를 수놓는 꽃들이 길목마다 방문객들을 반긴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용암수형석’이란 독특한 암석도 볼거리 중 하나다.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이 나무 위에 흘러 굳은 뒤, 안의 나무가 탄화되어 사라지면서 정 가운데가 뻥 뚫린 모양을 하고 있다. 잘 꾸며놓은 수목원 같지만 모두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연이 조성한 풍경들이다.

자연의 솜씨를 구경하면서 동시에 각종 체험도 즐길 수 있다. 매해 1~2월 눈이 쌓이는 시기에 맞춰 사슴상 잔디광장에서는 눈썰매 타기 체험을 실시한다. 산굼부리의 야트막한 경사면은 눈이 온 뒤 아이들의 좋은 자연 놀이터가 된다. 2014년부터 안내 해설 프로그램도 개시되어 정해진 시간에 새로운 정보를 얻으며 참관할 수도 있다. 가을을 비롯해 모든 계절을 넉넉히 담아내는 산굼부리의 품 안에는 아늑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


업데이트 2017-11-03 13:27


이 섹션의 다른 기사
사보 다운로드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