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한다. 저마다의 목표를 골인 지점으로 두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여정이 닮았기 때문이다. 긴 훈련의 여정을 지나 국제기능올림픽대회라는 반환점을 1등으로 돌고 그 다음 코스로 향하는 이가 있다. 제4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기계설계CAD 직종 금메달리스트 서재은 씨다. 사진_ 삼성전자㈜ 제공
14년 만의 금메달로
우리나라 최고득점까지 삼성전자㈜ 소속 서재은 씨가 제4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2003년 이후 14년 만에 기계설계CAD 직종에 금메달을 안겼다. 동시에 국가 최우
수선수(Best of Nation)에도 선정됐다. 국가 최우수선수란 일정한 기준에 따라 각 직종의 점수를 800점으로 환산해 최고점수를 낸 이를 말한다. 재은 씨는 768점이었다.
“경기 중 메달에 대한 확신은 없었어요. 그저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그래서 금메달을 받았을 땐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게다가 국가 최우수선수라니,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기분이었습니다. 긴장하지 않고 신중하게 경기에 집중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기계설계CAD는 컴퓨터를 활용해 제품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기술이다. 어떤 부품이나 구조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면 작성, 조립, 제품 작동 장면 구현까지 전 과정을 다룬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는 설계 및 변경, 조립, 실제 부품을 기반으로 3D 도면 그리기 등 총 4개의 과제로 경기를 치른다. 한 과제당 25점을 만점으로 계산해 합산점수를 낸다. 기계설계CAD 직종의 상위권 선수들은 1~2점 차이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 경쟁이 치열한데, 이번 대회에서 재은 씨는 은메달을 6점 차로 따돌리며 실력 차이를
입증했다. 하지만 순탄한 여정은 아니었다.
“사실 첫 과제부터 점수를 많이 깎였어요. 네 개 부품의 도면을 한 장으로 그려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두 장으로 제출해서 한 장에 있는 두 개 부품만 점수를 받았던 거죠.”
첫 날 실수에도 불구하고 재은 씨는 특유의 차분함으로 나머지 과제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결국 금메달과 국가 최우수선수까지 두 영예를 모두 껴안은 주인공이 되었다.
긴 훈련을 동행한 가족들의 응원
재은 씨가 기계설계CAD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3학년 때다. 2013년 당시 제42회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같은 나주 출신인 장민석 선수가 기계설계CAD 직종 은메달을 수상하는 장면을 본 아버지가 재은 씨에게 먼저 권유를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분야라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확실한 전문 기술을 배워두는 게 미래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나주공업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제품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는 점에 끌린 거죠.”
미래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다지고 고등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기숙사에서 지내며 매일 6시 40분에 기상해 밤 11시까지 몰두했다. 단기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는 장거리 레이스이기에 더 힘들었지만, 함께하는 친구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님의 응원 역시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나주공업고등학교는 선수 부모님들이 직접 식사를 준비하는 전통이 있어, 부모님의 밥심과 애정으로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가끔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꾸준히 집중을 유지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지방기능경기대회가 열릴 2~3년 후가 아주 먼 미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럴 때면 부모님이 기숙사에서 하룻밤 함께 있어주며 기운을 보태주셨어요.”
고된 시간 끝에 재은 씨는 2학년이던 2015년 전남 지방기능경기대회를 거쳐 전국기능경기대회까지 차례대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긴 길 위에서 비로소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은 순간이었다.
다시, 새로운 길 위에
두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재은 씨는 삼성전자(주)에 입사했다. 삼성전자(주)는 국내외 기능경기대회를 지원하고, 우수기능인력 채용, 선수 훈련, 한국 국가대표팀 후원 등 물심양면으로 우리나라 기술인들의 기량 향상에 앞장서고 있다. 재은 씨의 입사도 가능성 있는 기술인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숙련기술인으로 성장시키는 삼성전자(주) 기술 인재 육성의 일환인 셈이다. 재은 씨는 삼성전자 내 기능올림픽 훈련센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3학년 교육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훈련센터 장민석 코치님이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지도해 주셨고, 정규 수업이 끝난 후에는 훈련센터에서 기초이론부터 국제대회 준비까지 체계적인 훈련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시험을 해볼 수 있었죠. 특히 좋았던 건 대회 전 외국인 선수들과 교류해 볼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기술적인 부분을 나누는 과정에서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재은 씨는 베트남, 러시아 기계설계CAD 직종의 선수들과 만나 다양한 의견을 공유했다. 거기에 더해 2016년 7월 아부다비에서 진행된 한국산업인력공단의 기술전수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것이 국제대회 준비에 좋은 거름이 되었다. 이런 고마운 마음들을 잊지 않기에 재은 씨는 자신의 뒤를 이을 다음 주자들을 위해 길을 더 단단하게 다질 예정이다.
“우선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훈련으로 다듬은 기술력에 전문적인 지식을 더한다면 저만의 무기가 더 날카로워지지 않을까요? 전기, 전자 등 다른 직종도 배워보고 싶어요. 융합기술이 트렌드이기도 하니까요. 더 먼 미래에는 교수나 대한민국명장이 되고 싶습니다. 기술 훈련과 공부를 병행해서 더 재미있는 쪽을 특화하고 싶어요.”
힘든 훈련 기간을 이겨내고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아 새로운 길 위에 선 재은 씨. 축적한 기술 노하우로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앞으로의 여정이 그가 건 금메달처럼 환하게 빛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