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시작점에 서면 노란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은행나무들이 틈 없이 서로의 몸에 바짝 기댄 덕분이다.
샛노랗게 빛나는 풍경에 눈이 시릴 때쯤 들어선 길에서는 어느 카페의 커피향이 반긴다. 냄새에 취해 몇 걸음 더 걸어가는 발끝에 바짝 마른 낙엽이 걸려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매만지고, 바람을 타고 낙하하는 은행잎 한 장이 손끝을 스친다. 곡교천변 은행나무길에서는 이 계절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사진 제공_아산시청
걷다 - 곡교천변 은행나무길
곡교천변 은행나무길의 기준이 되는 곡교천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에서 시작해 아산시 인주면 대응리 삽교천으로 들어가는 제1지류이다. 1966년에 시작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73년 하천을 따라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곡교천변 은행나무길이 되었다. 충무교에서 현충사까지 완만하게 커브를 그리는 도로 양 옆에 350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로 또 같이 서 있다.
나이 오십이 훌쩍 넘은 키 큰 나무들이 촘촘하게 늘어선 풍경만으로도 장관이지만, 이 길의 진가는 이름처럼 은행잎이 물들 때 나타난다. 샛노랗게 단장한 나무들이 노란 천장을 만들고, 떨어진 낙엽들로 푹신한 양탄자를 바닥에 깔아 특별한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길 끝에 다다라야 겨우 파란 하늘이 한 점 보일까. 온통 노랗게 칠해진 터널은 그 자체로 가을과 같아서 길을 걷다 보면 계절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이것이 ‘전국의 아름다운 10대 가로수 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고,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의 ‘아름다운 거리 숲’ 부문을 수상한 이유가 아닐까.
2013년부터는 ‘차 없는 거리’를 운영하고 있어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볼 수 있는 것도 이 길의 매력이다. 2016년 9월부터는 자전거 대여소도 운영하고 있다. 생활용MTB, 아동용, 커플자전거 등 200여 대의 자전거가 기다리고 있으니, 바퀴가 굴러가는 틈바구니로 도르르 구르는 나뭇잎들의 재롱이 보고 싶다면 14km에 이르는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신나게 라이딩을 즐겨보자.
멈추다 - 현충사
은행나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과 이어지는 길 끝에 만나는 곳. 사적 제155호의 현충사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장군이 실력을 기르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도 많은 이들이 현충사를 찾는 이유지만, 가을의 절경도 현충사의 명성에 한몫한다. 진입로에 들어서자마자 빽빽하게 들어찬 은행나무들이 곡교천변 은행나무들과 자신들 중 누가 더 반짝이느냐 묻는다. 귀한 손님이 된 기분으로 ‘옐로카펫’을 걷다 보면 2011년 개관한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활약을 담고 있는 곳으로 가을과 역사를 한눈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을 가슴에 안고 정문인 충무문을 넘으면 붉은 단풍으로 둘러싸인 정려1)를 비롯해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활터, 그 후손까지 대대로 살던 충무공 고택까지 곳곳에 묻은 장군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묵묵히 실력을 길렀을 장군의 기합소리를 배경으로 저 멀리 현충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경내를 한 달음 달려가고 싶겠지만 잠깐 거리를 둔 채 고개를 들고 멈추어 서자. 온 색채를 품은 듯 푸르렀다가, 붉었다가, 노르스름했다가, 결국엔 빛이 나는 잎들을 한 아름 두른 채 투명하게 높은 하늘을 머리에 인 장관과 마주할 테니. 오랜 세월을 품고서도 바래지 않은 이순신의 마음과 풍부한 색의 계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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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신,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내린 편액을 마을 입구에 걸어놓는 것을 말함. 이 충무공과 그 후손 등 다섯 분의 충신, 효자 편액이 걸려 있다.
마주하다 - 외암리 민속마을과 공세리 성당
은행나무길과 현충사를 나와 조금만 발걸음을 재촉하면 또 다른 가을을 만날 수 있다. 황금빛으로 물든 외암리 민속마을과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공세리 성당이다.
중요민속문화재 236호인 외암리 민속마을은 조선후기 성리학자 외암 이간 선생이 살던 곳이다.
실제 거주 중인 주민들에 누가 될까 조심스레 마을로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금빛 논이 시야를 탁 트이게 한다. 그 사이 초가와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인 풍경이 소박한 멋을 낸다. 이곳에서는 시간을 들여 마을을 둘러싼 돌담길을 걸어보는 게 좋다. 지붕, 담벼락, 나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가을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차를 타고 가다보면 공세리 성당이 보인다. 1890년 문을 연 성당에서는 그 오래된 역사를 차곡차곡 몸에 품은 거목들이 먼저 눈에 띈다. 국가보호수를 비롯한 나무들이 35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담담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은 모습이 가을의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갈색과 회색빛 벽돌로 정교하게 빚어진 성당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볼거리가 되어 준다. 지나 온 세월의 두께만큼 넉넉한 인심으로 품어주는 공간에서 느긋한 여유 속에 몸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