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끝 기술로 익힌 홍염, 조선의 역사를 지키다
    김경열 대한민국명장(섬유가공 부문)
  • 8734    

조선 시대 최고의 색이자 궁중의 격조를 담은 ‘홍색’.
그 홍색을 구현해내는 최고의 기술자를 일컬어 홍염장이라 한다.
천연 염색 40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김경열 명장.
그가 건네는 홍염 비단에는 여전히 붉은 빛이 살아 숨 쉰다.
글_김민정 사진_차유진


김경열 대한민국명장(섬유가공 부문)



조화와 화합의 힘,
40년 홍염장의 길

조선 시대, 홍색은 장수와 복의 상징이자 잡귀를 막아준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녔다. 왕세자와 당상관 이상의 관복에만 붉은색을 썼으며, 임금의 용포, 왕비와 공주의 예복인 홍원삼에는 가장 붉은 빛을 띠는 대홍색을 썼다. 이렇듯 귀히 쓰이는 붉은색을 구현해내던 이들을 일컬어 홍염장(紅染匠)이라 불렀다.

김경열명장은 40년 이상을 명주실 등 직물 제조와 염색 공예에 종사하며, 과거 홍염장의 명맥을 잇고 있는 이다.

"홍염이란 홍화·토막나무·꼭두서니(식물의 한 종류)등을 이용해 천을 홍색으로 염색하는 것을 말하죠. 홍화는 붉은색을 지닌 대표적인 염료 식물이에요. 유기물인 꽃에서 홍색을 추출한 후 천에 담아내니 그 빛깔이 매우 맑고 아름답습니다."

1982년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공방을 연 후, 명주실을 짜고 천을 염색하는 데 수만 시간을 쏟았다. 그러다 천연 염색을 하는 이라면 재료가 가진 특성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느 종묘학자의 말에, 명장은 충북 단양에서 홍화를 직접 재배하며 홍화가 지닌 붉은 빛을 가장 선명하게 구현해내기 시작했다.

“홍화는 3월 말에서 4월 초에 파종해 6월 말에 꽃잎을 거둬들여요. 그 후에 본격적으로 홍염을 하죠. 그러나 홍화 자체로는 염색이 안 돼요. 붉은색을 내려면 오미자나 매실초의 도움이 필요하죠. 또 유기물이다 보니 40도 미만의 온도에서 다루는 섬세함도 필요합니다.”

홍염은 조화와 화합의 결과다. 단순히 홍화 꽃잎을 짓이겨 홍색을 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홍화 꽃잎을 잿물에 넣어 홍색 색소를 빼고, 여기에 오미자나 매실초를 넣어 중화작용을 일으킨 뒤에야 홍염을 위한 ‘염액’이 완성된다. 그 염액에 정련 표백한 옷감을 넣으면 비로소 홍염 천의 완성이다. 이 같은 과정을 몇번 반복하는가에 따라 붉은빛의 농도가 달라진다. 명장은 이 같은 홍염의 과정이 자신의 삶과도 닮았다고 전한다.


“어릴 적 자연스럽게 명주실 공방에 입문했고, 10대 시절에 손끝으로 기능을 익혔어요. 이 일이 제 적성에 맞았다고 할까요. 그 재미에 더해 1990년대 초부터 훌륭한 분들과 한 점, 한 점 문화재 복원을 하다 보니 지금의 결과물이 나온 거죠.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주변 이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내비치며 웃는 그의 얼굴이 붉게 피어오른다.


손끝에 밴 기술로 국보를 다루다
 


김경열 명장은 40년간 홍염장의 길을 걸으며 2008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 2013년 섬유가공부문 대한민국명장 선정 등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기능을 인정받았다. 2017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재(제49호)에 지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서울시 대표로 지정된 데는 명장이 해온 ‘문화재 복원’ 작업의 역할이 컸다. 그가 복원해낸 것들로는 충무공 이순신 5대손 이봉상 장군 갑옷, 명성황후 10첩병풍,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가사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가 프랑스로부터 반환받은 외규장각 의궤 표장 복원 작업을 맡았다.

“외규장각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행한 의식이나 다양한 정보를 생생하게 담은 기록물인데, 그 의궤의 ‘표장’을 복원했습니다. 일부 남아있는 색을 추출하고, 그 색을 구현해내기 위해 수차례 염색 과정을 거
쳤죠. 잘 해내야 한다는 심적 부담도 크지만, 200여년이 흐른 과거 조상들의 흔적을 담은 문화재를 복원하는 건 무척이나 가슴 뛰는 일입니다.”

한편, 명장은 서울시 무형문화재에 선정된 후 지난해 11월부터 북촌 한옥마을 전통홍염공방에서 우리 문화 전승에 힘쓰고 있다. 그의 홍염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내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의 방문도 잦다. 이는 ‘북촌’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이다.

“북촌 한옥마을은 궁궐과 함께 한옥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죠. 이러한 건축물과 더불어 과거 궁중에서 행한 활동과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콘텐츠를 누려보고자 하는 외국인이 많습니다. 그들이 자연스레 공방을 방문하죠.”

먼 과거로부터 이어온 기술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겠다고 다짐하는 김경열 명장. ‘홍염이란 계절에 따라, 온도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색’이라는 말처럼 홍염 기술에 대한 그의 애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요령이나 꾀를 모르고 배운 기술로 외규장각의 의궤 표장까지 복원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때로는 어려운 순간도 있었지만 한 길을 꾸준히 걷다 보니 이 자리에 서게 됐죠. 대한민국명장이자 서울시
무형문화재로서 앞으로도 복식 문화, 염직 문화의 전승에 힘쓰겠습니다.”



 

업데이트 2018-03-05 19:45


이 섹션의 다른 기사
사보 다운로드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