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그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전라북도 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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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 기세로 몰아치던 추위가 드디어 지나갔다.
사람들의 마음마저 얼어붙던 계절을 기어코 견뎌낸 이들에게는 그에 맞는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법.
부안은, 그런 선물로 가장 적당한 곳일 것이다.
글·사진_정환정 여행작가


광활함 앞에 서다
새만금 방조제. 볼 게 많은 곳인 부안이건만, 그 중에서도 이곳을 먼저 들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환경운동의 상징이자 수많은 갈등이 빚어지고 또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자연의 가치를 깨달아야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소.

처음부터 무겁게 시작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뒤에 이어질 일정의 의미가 더 깊어진다. 부안부터 군산까지 33.9km에 이르는 장대한 방조제가 세워진 이곳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 비슷한 규모를 찾기 힘들 정도. 그래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지만, 그 광활함을 제외하면 다른 감상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맑은 날에도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보니 생태의 변화도 심한데, 대부분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만 들린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원래는 갯벌이 존재하고 있어야 할 공간이 이제는 그저 그런 벌판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살던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조성된 개간지에는, 아직 어떠한 뚜렷한 계획도 실행되고 있지 않는 상황.

새만금을 방문하게 된다면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란 무엇인지 생각해 봐도 좋겠다.


바람의 소리를 듣다
부안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 바로 내소사다. 국내에 있는 사찰 그 어느 곳보다 진입로가 아름다워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명상에 든 것 같은 느낌을 주니 말이다. 특히 내소사에 이르는 길은 산의 초입이라 그런지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도 도시의 그것과 다른 느낌을 담고 있다. 머리 위로 조용히 길을 밟는 바람에 맞춰 숨을 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방인의 탄식에도 전나무들은 항상 담담한 표정.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서 있는 전나무들의 나지막한 침묵을 깰지도 모르니 조심스레 움직여야 한다. 그때 불어오는 또 다른 한줄기 바람. 사그락 사그락 사그락… 그렇다. 속 깊은 여행자는 틀림없이 바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전나무 그 얇고 가는 나뭇잎 위를 사뿐 사뿐 뛰어 어느새 등 뒤로 사라진 바람의 자취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시나브로 엷은 햇살이 눈앞으로 퍼진다.
 


전나무 숲이 끝나면 양 옆으로 넓게 퍼진 푸른 잔디밭이 채 사라지지 않은 어둠을 품고 있다. 사천왕에게 슬쩍 인사를 하고 천왕문을 나서면, 이번엔 봉래루와 만나게 된다. 대부분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서서 누각과 문의 역할을 하는 봉래루는 땅부터 누각까지의 높이가 상당히 낮아 키가 큰 사람이라면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할 정도다. 이렇게 높이를 낮게 한 것은 옛 양반들이 말을 탄 채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잠시나마 어둠 속에 있던 눈을 밝게 만드는 건 황토빛 대웅보전이다. 못 하나 쓰지 않고 그저 나무를 깎아 요철 부위를 연결시켜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보더라고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게으른 발걸음으로 경내를 돌아보고 올라온 길을 되밟으려는데 어떤 소리에 머리가 맑아진다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라.

전나무 숲을 한참 전에 지나갔던 그 바람이 이번엔 대웅보전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풍경을 건드리고 총총 도망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아름다워 슬픈 낙조를 보다
어느 소설에서는 채석강의 낙조를 ‘피보다 붉은 석양’이라 묘사했다. 얼마나 붉기에 그런 묘사를 했을까. 그 실체를 목격하기 위해서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바닷가에 도착하는 게 좋다. 갯벌 위를 오가는 아빠와 아이를 보며 춥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수평선 위쪽이 조금씩 핑크빛으로 변하는 게 보인다.
 


바다 끝머리에 있는 구름이 두터울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날이 제대로 된 낙조를 만날 수 있는 날. 태양이 수평선에 걸치면 하늘은 그 자체가 붉디붉은 불덩어리로 변해 무엇이든 한없이 감추기만 할 것 같은 구름마저 붉게 물들인다. 하늘도 바다도 사람도, 그저 태양 앞에 선 모든 것을 선홍색으로 바꾸는 그 신비한 마법 속에서 누가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본격적인 낙조는 태양이 사라진 후부터 시작이다.

구름은 어느새 붉은 카펫으로 바뀌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은 그저 채석강을 빛내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 어떤 것도, 거대한 낙조 앞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지된 풍경속에서 이미 넘실거리는 봄의 기운이 숨어 있다.

 

업데이트 2018-03-2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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