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차를 몰고 북쪽으로 15㎞,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작은 읍이 바로 완주군의 삼례읍. 읍내를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곳은 없다.
지어진 지 오래되었을 건물들은 얼마 전 새롭게 단장을 마쳤는지 외관이 깔끔했지만, 그동안의 역사도 모두 반짝이는 벽돌 아래로 사라져버린 듯했다.
특색이 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삼례의 생활공간 이야기다.
그곳을 지나면, 곧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술 공간이 나타난다.
글·사진_정환정 여행작가
“책으로 먹고 살자”는 마을
낡은 외벽에 새로 얹어놓은 말끔한 지붕이 눈에 띄는 건물에 “삼례는 책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걸개가 걸려 있다. 자세히 보니 ‘삼례 책마을’에서 걸어놓은 것. 국내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영국의 헤이 온 와이, 벨기에의 르뒤, 프랑스의 몽틸리외 등 마을 전체가 책으로 가득 찬 ‘책마을’은 유럽에만도 몇 군데나 있다. 그리고 이제 삼례가 그들처럼 성장하려는 참이다.
책마을을 구성하는 공간은 북 하우스와 북 갤러리, 한국학 아카이브, 삼례 책마을센터 총 네 곳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서로 이웃한 북 하우스와 북 갤러리는 언제든 책을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독특한 외양. 금방이라도 쇳가루가 떨어질 것처럼 보이는 녹슨 외벽은 건물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느낌을 주는데,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이 두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지어졌다.
삼례 인근은 물론, 만경평야에서 부터 수탈한 한반도의 곡식들을 일본으로 송출하기 전 쌓아두던 양곡창고였던 두 건물은, 70년대부터는 농협의 비료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그러던 것을 2016년 1월부터 리모델링해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굽이진 역사의 외피 안에 들어찬 것은, 또 다른 역사를 품은 수많은 도서들. 북 갤러리에서는 18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겸 그림책 작가였던 케이트 그린어웨이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고, 북 하우스 안에는 약 10만 권의 도서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많은 책들 모두가 헌책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대부분 판매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북 하우스가 전시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그래서 북 하우스 안에서 만나는 책들은 모두 저마다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오래된 책들인데도 생명력이 느껴진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거기, 예술이 있는 풍경
곡창 지대인 삼례에는 창고가 흔했다. 그리고 그 창고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까지 남아 곡식이 아닌 예술을 품고 있다. 북 하우스가 책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입구에서 관람권(성인 2,000원 /학생 1,000원 / 만 3세 이상 500원)을 구입한 후 너른 마당처럼 보이는 삼례문화예술촌 안으로 접어들면 좌우로 낮고 넓게 퍼진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간은 비주얼 미디어 아트센터. 설치미술과 비디오 아트 등 젊은 미술가들의 다양하고 실험적인 재능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인데, ‘누구든 재미있게 즐기며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기치에 맞게 익살스럽거나 인상 깊은 작품들이 많다.
이어지는 책 박물관에서는 수십, 길게는 백 년 전에 발행된 책들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 틀림없다. 엄마의 엄마 혹은 아빠의 아빠가 공부할 때 사용했을 교과서나 숨어서 몰래 봤을 법한 만화책, 이발소 등에서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을 가벼운 책들은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채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흥미와 호기심은 이웃한 책공방 북아트센터에 들어서면 배가 된다. 조금 아까 보았던 책들이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필요로 했던 다양한 장비들을 만날수 있기 때문. 활판기라든지 등사기, 납 활자 같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 인쇄한 종이를 한 데 묶어내던 제책기 등은 모두에게 미지의 기계처럼 보일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두 곳 모두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점. 하지만 카메라에 영상을 저장하는 것보다 자세히 살핌으로써 머릿속에 담아두는 편이 기억에는 오래 남는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관람하도록 하자. 은은한 나무 향기 속에서 다양한 목재로 작품을 만드는 김상림 목공소의 관람도 마쳤다면 문화카페 오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도 좋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 특히 신선한 원두를 이용한 드립커피는, 한 모금 머금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훌륭한 맛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런 커피를 마시며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통유리창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다. 그 풍경 속에서, 하루동안 보았던 것들을 차례대로 떠올려 보자. 그러면, 왜 이곳이 문화예술촌인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그저 돌아보고, 감상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예술적 감상이 일어나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바로 삼례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