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라 하면 창원과 통영, 거제 같은 해안 도시가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꼭 바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지리산을 거슬러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곳곳에 산줄기가 품고 있는 고장을 여러 곳 만날 수 있다.
동의보감에 등장한 전설적인 의원 유의태가 살았던 산청과 고고한 자태의 고택이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함양, 수승대가 있는 산청이 바로 그곳들이다.
글·사진_정환정 여행작가
이름 그 자체가 사연인 곳
거창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였다. 해서 백제에서 신라로 사신이 갈 때면 수승대에 이르러 배웅하던 사람들과 작별을 했는데, 몸 성히 돌아올지 장담을 할 수 없던 마음을 담아 처음엔 수송(근심 수愁 보낼송送)대라 이름 지었다 한다. 그랬던 곳에 조선 중기 학자 요수신권 선생이 은거하며 구연서당(龜淵書堂)을 건립했는데, 후에 근처를 찾았던 퇴계 선생이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비슷한 음의 수승대(搜勝臺)라 바꾸길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요수 선생에게 보냈다. 요수 선생은 이에 기꺼이 이름을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실제 수승대는 수많은 지리산권 계곡 중에서도 첫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절경을 자랑하는 공간이다. 특히 계곡에 어우러진 거북바위와 서원, 사당, 소나무숲 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화로움으로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저 단순한 물놀이용 계곡으로만 활용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열린 공간인 셈이다. 그런 수승대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거창 흥사단에서 운영하는 체험프로그램인 ‘수승대를 사수하라’에 참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수승대를 사수하라’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되는데, 수승대 주차장에서 모여, 인근마을 부녀회에서 준비한 이른 점심식사를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지역의 부녀회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갖고 음식을 만드는 덕분에 낯설지만 익숙한 어머니의 손맛을 듬뿍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하는 반찬은 얼마든지 더 덜어먹을 수 있도록 뷔페식으로 마련되어 있어 푸짐한 거창의 정을 느끼기에도 안성맞춤인 시간이니, 만약 ‘수승대를 사수하라’에 참여하게 된다면 속을 조금은 비우고 시작하도록 하자.
이후 거창연극제가 시작되면 주공연장으로 활용되는 무대에 모여 12~14명 단위로 팀을 이루게 된다. 이어 전용GPS 프로그램이 설치된 스마트폰과 지도를 나눠갖고 본격적인 수승대 탐험을 시작한다. 관수루, 구연서원, 거북바위, 요수정, 함양재, 포토존, 현수교 등이 그 대상. 모두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지만, 각 팀마다 방문해야 하는 순서가 다르기 때문에 다음 방문지를 하나씩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흥미가 더해간다.
하이라이트는 그저 찾아가는 데에 있지 않다. 순서에 맞게 찾아간 곳에서는 각 팀을 위한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 수승대 구연서원에서는 사율시를 종이에 찍어낸 후 각종 스탬프로 꾸밀 수 있고 거북바위가 내려다보이는 포토존에서는 에코백에 알록달록 거북을 색칠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인기가 좋은 체험은 바로 요수정에 있다.
그 깊은 산 속 계곡
한가운데서 가을의
가장 앞선 모습을 만나다
요수정은 요수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처음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다시 수파를 만나 1805년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유서 깊은 곳에서 소리의 고장 남원에서 온 판소리 선생님과 전수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전수생들이 ‘우리 소리’를 멋들어지게 뽑아낸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 탐방객들은 TV 등의 매체를 통해서만 접하던 흥겨운 가락을 직접 마주하며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진다. 뿐이랴, 옆에는 간단하게나마 막걸리를 즐길 수 있는 주안상도 마련돼 있어 흥과 풍류를 돋우는 데에 더 없이 좋다. 아이들에게는 유산균 음료가 제공되니 온가족이 다함께 건배를 외치는 데에도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즐거운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다 보니 ‘수승대를 사수하라’에 참여한 가족들의 반응은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자연 속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마음껏 만끽할 수 있고,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뛰어 다니다 보면 어느 틈엔가 하루가 저물어 간다. 특히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소품들을 자랑하고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 일정이 마무리되면 참가자들은 기념품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일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도 많은 흥미가 생긴다면,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수승대에서의 1박 2일’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거창 흥사단(gcyka.or.kr 055-943-2013)으로 하면 된다. 만약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게 부담이거나 그곳에서 지정한 날짜와 일정이 맞지 않다면, 그저 원하는 날을 골라가면 된다. 비록 사람들이 북적이거나 누군가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 깊은 산 속 계곡 한가운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을의 가장 앞선 모습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