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따뜻한 봄날 4월이면 남녘 마늘밭에서는 그 전 해에 심었다가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파랗게 자란 풋마늘을 수확하느라 일손이 바쁘다. 그런데 2011년 4월 전북 김제 어느 마늘밭에서는 대형 굴착기가 동원되어 요란하게 굉음을 내며 밭을 온통 뒤집어엎고 있었다. 문제의 마늘밭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이 있었던 탓이다.
며칠 동안 300평 넓은 마늘밭을 파헤쳐 보니 땅속에는 잘 익은 마늘 뿌리 대신 5만 원짜리 돈다발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김제 마늘밭 돈 보따리’ 사건이 세상에 떠오른 순간이다. 그야말로 김유정의 소설 ‘금 따는 콩밭’에 비견할 만한 ‘돈 따는 마늘밭’이 아닐 수 없다. 범인들은 그동안 마늘밭에서 마늘 농사가 아니라 ‘돈 농사’를 지어왔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늘밭 주인 이 씨는 2, 3년 전부터 서울에 사는 처남이 그때그때 맡긴 현금을 전주에 있는 아파트 다용도실에 보관해 왔다. 그러나 쌓아둔 돈 보따리의 양이 많아 넘치게 되자 궁리 끝에 마침 가까운 김제에서 매물로 나온 마늘밭을 사게 되었다. 이 씨 부부는 수차례 이웃의 눈길을 피해 1m 정도 땅을 파내고 두꺼운 비닐봉지에 싼 돈 보따리 수십 개를 플라스틱 김장독과 페인트 통에 나누어 담은 후 파묻었다.
압수수색 결과 이씨의 처남 형제가 약 1년 반 동안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범죄수익금 170억 원 가운데 이씨 부부에게 맡긴 돈 110억 7,800만원이 그 밭에서 나왔다. 당시 경찰에 발각된 큰 처남은 중국으로 도망가고 작은 처남은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할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이씨 부부는 처남이 맡긴 거액의 불법도박 수익금을 왜 마늘밭에 파묻어야 했을까? 이씨 부부나 그 처남들이 바보들인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평생 그 정도 돈을 구경조차 못 해 본 필자보다는 머리가 좋은 것 같다. 그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은 바로 20여 년 전부터 실시된 ‘금융실명제’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는 은행이나 증권 등 금융기관 거래에 있어서 가명이나 차명 거래가 금지되고 신분이 확인된 실명 거래만 허용하는 제도이다. 또한 금융실명제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기관으로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있다. 금융정보분석원은 범죄수익금 등 불법자금출처를 조사하고 자금세탁 방지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실명 거래라고 하더라도 금융기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루 2,000만 원 이상의 고액 현금거래와 1,000만 원 이상의 자금출처가 의심되는 거래는 반드시 금융정보분석원에 신고하게 되어있다. 그러다 보니 이 씨 부부나 그 처남들은 거액의 불법도박 수익금을 현금으로 보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5만 원짜리 현금으로 보관한 돈 110억원의 양과 부피를 살펴보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현금 1억 원은 5만 원짜리 2,000장으로 그 무게가 약 2kg에 달하고 한 장씩 쌓게 되면 그 높이는 약 22cm에 달한다. 110억 원이면 그 무게가 약 220kg, 높이가 약 24.2m이므로 약 10층짜리 아파트 높이에 해당한다. 그나마 고액권으로 5만 원짜리가 나와서 망정이지 과거처럼 1만 원짜리만 있었다면, 110억 원의 무게는 자그마치 1.1t이고, 그 높이는 50층짜리 초고층 건물에 해당한다. 아무도 몰래 마늘밭에서 돈 농사를 지어야 할 이 씨 부부에게는 그나마 5만 원짜리 고액권이 나온 게 다행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 씨 부부는 범죄수익금 은닉죄로 징역 1년 등 형사 처벌을 받았고, 마늘밭에서 나온 돈 110억 원은 전액 당국에 몰수되었다. 그 후 교도소에서 부푼 가슴을 안고 만기 출소하였던 이 씨의 처남 또한 빈털터리가 되는 등 결국 ‘돈 따는 마늘밭’은 일장춘몽 - ‘나른한 봄날의 꿈’으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