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특별한 계기 하나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나에게 그 계기는 용접 자격증이었다.
1998년 국가적 위기 상태였던 외환위기 시절,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옷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손님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온라인 쇼핑몰의 발달로 동대문 의류 시장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겠다는 생각으로 1t 트럭을 구입해 전국 각지의 5일 장터, 아파트의 알뜰 장터 등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장사꾼으로 떠돌이 생활을 반복했다. 이런 삶에 지쳐 있을 때쯤 포항 재래시장 근처 신축 빌라 공사장에서 반짝이는 강렬한 섬광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 빛이 눈에 거슬렸지만, 점점 호기심이 생겼고 궁금해졌다. 번쩍일 때마다 단단한 철들이 한 몸이 되어가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용접을 배우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일을 바로 그만둘 수는 없어 조그마한 설비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터는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받는 곳이지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은 아니었다. 설비업체를 그만둔 후 1년만 나를 위해 투자하겠다는 생각으로 용접기술 학습과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훈련기관을 알아봤다. 인천의 한 직업학교에 지원했지만, 입학 면접을 보던 날 나는 좌절을 맛봤다. 훈련학교 교수님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업체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채용하려고 하지 않으며, 더욱이 손으로 하는 정밀한 기술이라 취업이 힘들 거라고 말했다.
나는 오른쪽 다섯 손가락 중 검지, 중지, 약지 세 개의 손가락이 없거나 굳어져서 사용할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장애라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그것이 불편한지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다른 사람이 나의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경기도 화성 소재의 직업학교에 지원했다. 그리고 면접날 젓가락과 생쌀을 챙겨 갔다.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미리 준비해간 쌀을 책상위에 부었고, 장애가 있는 오른손으로 나무젓가락을 사용해서 쌀을 하나씩 옮기며 이야기했다.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학교에 학생이 되었고 1년간 직업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던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에 학교 가는 것이 행복했다. 수업 시간보다 일찍 등교해서 동기생들이 실습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었고, 재직자 교육이 있는 날이면 저녁 10시까지 교수님을 도와 드리며 한 편에서 용접 연습을 했다.
학교에 다니는 8개월 동안 자격증 취득에 매진한 덕분에 2개의 기능사와 1개의 산업기사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기술자격 시험을 통해, 신체적 장애로 스스로를 폄하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취업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고 자격증을 바탕으로 대기업 계열의 복합 화력발전소에 이력서를 넣었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자격증을 취득한 사실이 나에 대한 성실성을 증명하는 보증수표처럼 작용했다. 덕분에 그 회사에 당당히 합격하여 복합 화력발전소의 플랜트 특수용접사로 일하게 되었다.
현장경력을 쌓으면서 든 생각은 나처럼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애를 이유로 기술 배우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나는 직업훈련교사가 되어보자고 결심했고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교직과정을 이수하여 교사자격증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호남직업전문학교의 용접교사가 되고 난 후 용접 분야 최고 자격증인 용접기능장 합격을 목표로 시험을 계속 준비했다. 수업이 종료되면 실습장에서 매일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장애를 극복하고 용접기능장까지 취득한 순간, 내가 결국 이루어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다.
다른 기능장 시험에 계속 도전해 나갈 것이라는 꿈도 꾸게 되었다. 지금 나는 용접기능장으로서 학교 훈련생에게 내가 가진 최고의 자산인 용접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국가기술자격을 알지 못했다면 아무런 목표 없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자격증은 나에게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 주었고, 일할 기회를 주었다. 또 내가 가진 장애를 극복할 힘을 주었다. 국가기술자격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나의 사례가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