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여름과 겨울은 피하고만 싶어진다.
지나치게 덥거나 지나치게 춥기 마련이니까.
그나마 한반도에서 가장 온난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제주 역시, 겨울은 돌아다니기 좋은 계절이 아니다.
어쩌면 한반도에서 가장 끈질기고 강한 바람에 휩싸인 일정을 보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겨울의 제주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오직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얼굴을 보여주는 그 검고 거친 바다는 더더욱 매력적이다.
글·사진_정환정 여행작가
파도 앞으로 나아가는 길
겨울 제주의 파도는 거세다. 계절에 맞지 않는 낭만을 찾아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얼른 세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도가 때때로 바다의 경계를 넘어 도로까지 하얀 물거품을 흩뿌린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진녹색으로 보였던 바다는 어느 틈엔가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고, 하얀 이빨을 드러낸 파도가 저 먼 곳에서부터 맹렬하게 달려오는 모습을, 겨울 제주에서는 온종일 볼 수 있다.
바뀐 것은 비단 바다 뿐은 아니다. 온통 높고 푸르기만 하던 하늘도 겨울이면 험상궂게 변해 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제주를 내려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런 하늘의 시선을 이고 바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달리는 기분은, 의외로 흥미진진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파도는 자동차를 덮치려고 달려드는 것 같은 기세로 몰아치고, 뒤질세라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드린다. 가끔 앞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휘청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그것이 진짜 바람의 힘이다. 그 바람이 바로 그 사나운 파도를 일으킨 것이다.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기분이 드는 이런 풍경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두꺼운 옷을 입고 바람과 마주 서는 것. 커다랗게 귀를 울리는 소리가 바다의 것인지 바람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경험은, 도시의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밀려오는 기세 속에 오직 자신의 두 다리만 믿고 서 있는 것은, 제주의 그리고 겨울의 민얼굴이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하기에 앞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자동차 안의 히터는 반드시 최대한으로 설정해놓고 절대로 시동을 끄지 말자. 얼얼해진 얼굴을 온기가 어루만져주지 않으면 그대로 굳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후 관리 역시 중요하다. 가까운 곳에 따뜻한 국물을 파는 가게를 찾아두는게 좋다.
그것이 제주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물을 넣은 라면이든,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끓인 고기 국수든 몸을 덥힐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물론 근처의 대중탕이나 온천으로 뛰어드는 적극적인 방법도 더할 나위없이 좋은 선택이다. 어떻게든 몸이 다시 온기를 느끼게 되면 그제야 제주의 겨울이, 그리고 겨울 바다가 얼마나 인상 깊은 존재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람을 피하는 은밀한 방법
바닷바람이 너무 강하다 생각된다면, 오름에 오르면 된다. 겨울이라, 무성한 풀들이 힘을 잃어 더 오르기 쉬워지는 오름은 제주의 속살이, 사람을 품고 있는 그 보드라운 살갗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오름에도 바람은 불어오지만, 바다에서만큼은 아니다. 무엇보다 오름의 정상 혹은 중간, 아니면 그 어디쯤에서, 뛰어서라도 금세 내려가고픈 아늑한 저 아래의 풍경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여주고 있으니, 꼭 한 번 올라보도록 하자. 거기서 바로 제주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예 바람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면 된다. 바로 절물휴양림이다. 감귤나무의 바람 피해를 막기 위해 심은 삼나무 인공 숲인 ‘절물휴양림’의 산책로는 대부분 숲속에 갑판이 깔린 형태로 이어져 있는데, 그 길은 가끔 구불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환한 개활지로 사람을 이끌기도 한다. 주위는 폭신한 삼나무 잎들이 완충재처럼 소복하게 쌓여 있고 검은 돌과 바위 위로는 단순히 ‘연두’ 혹은 ‘초록’이라 명명하기엔 뭔가 아쉬운 신비로운 빛깔의 이끼들이 뒤덮여 있다. 게다가 이곳은, 어쩐지 바람마저 만나기 힘들다.
들리는 소리는, 그래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발소리뿐이다. 많은 사람이 제주에는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라 오해하기 쉬운 겨울이라 누릴 수 있는 호사이기도 하다. 어쩌면 겨울에도 용케 찾아왔다는 의미에서 제주가 건네는 선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