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미새와 부귀재천
    이 지 훈 - 국가인권위원회 파견 군법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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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혹시 ‘돈미새’라는 신조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바로 ‘돈에 미친 새X’라는 말입니다. 온갖 종류의 돈 버는 방법이 난무하는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교적인 질서 속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어땠을까요? 우리 선조들의 여유로운 삶을 한번 떠올려 볼까요. 치열한 속세의 삶과 대비되는 것은 아마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일 것입니다. ‘안빈낙도’의 사전적 의미는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성인인 공자는 안빈낙도하는 삶을 추구했을까요? 우리의 기대와 달리 공자 역시 부(富)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공자는 “부가 구해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말채찍을 잡는 자의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 부이가구야 수집편지사 오역위지)”라고 말하였습니다.


공자는 부귀(富貴)를 좋아하고 빈천(貧賤)을 싫어하는 것을 사람의 본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유교적 자본주의 관념입니다. ‘부(富)’는 그 자체로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안(安)’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가난함을 좋아한다는 뜻인 ‘안빈(安貧)’은 인간의 본성에 배치되는 허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필부와 같이 돈만을 숭상했다면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겠죠. 역시나 공자는 ‘부귀’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다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합니다. 바로 ‘의(義)’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이익(利)을 얻기 전에 먼저 의(義)를 생각해야 합니다. 공자는 부귀 자체가 아니라 의롭지 못한, 즉 불의한 부귀를 누리는 것을 뜬구름과도 같은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면서 또 천하기까지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유하면서 또 귀하기까지 한 것도 부끄러운 일ʼ인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되는 점이 바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숙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死生有命 富貴在天 ; 생사유명부귀재천). 누구나 부귀를 좋아하지만 누구나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돈이 쫓아 와야지 돈을 쫓아가서는 돈이 도망간다’는 말을 쉽게 듣습니다.

바로 부귀는 재천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일찍이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공자는 “부가 억지로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如不可求 從吾所好 ; 여불가구 종오소호)”라고 말합니다. 즉, ‘부’라는 것은 사람이 의지에 따라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결국 사람의 의지의 범위를 벗어난 일을 추구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느니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훨씬 보람찬 인생인 것입니다.

공자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유함과 고귀함, 이 둘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얻고자 하는 바이지만 그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가난과 천함, 이 둘은 비록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 도로써 얻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富與貴 是人之所慾也, 不以基道 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 得之 不去也 ; 부여귀 시인지소욕야 불이기도 득지 불처야, 빈여천 시인지소오야 불이기도 득지 불거야).”

‘부귀’와 ‘의’는 ‘부귀는 재천’이라는 변수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부귀는 내 의지에 따라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인 ‘의(義)’를 행하겠다. 그런데 하늘의 의지에 따라 나에게 부귀가 온다면 그것이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버리지는 않겠다(편안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에게 빈천이 온다면 그것이 도로써 얻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또 내팽겨 치지 않겠다.’

부귀와 빈천은 하늘에 달려 있기 때문에 구태여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 처해도 ‘의’가 있도록 노력하면 될 일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을 구분하는 것이 불혹(不惑)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명을 알고 이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지천명(知天命)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부귀를 억지로 추구하는 데서 불행은 그 싹을 틔웁니다. 본인이 좋다면 기꺼이 돈미새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이십시오. 

업데이트 2019-03-19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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