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없는 도전으로 구워낸 기술인생
    김덕규 대한민국 명장 (제과제빵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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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처음으로 빵을 만졌던
소년의 얼굴에
어느덧 40여 년이라는
묵직한 시간이 내려앉았다.
경남 유일의
대한민국 제과제빵 명장,
아직도 빵 만드는 일이
설렌다는 그의 기술 인생이 궁금해졌다.
 


빵 만드는 일과의 인연
통영에서 나고 자란 명장은 바닷가에 즐비한 거대 선박들을 보며 자연스레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지역 특성상 기계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에 명장도 당연하듯 그 길을 걷게 될 줄 알았다. 그러다 명장이 ‘빵’을 만들게 된 것은 전국 5대 제과점 중 하나였던 통영 칠성제과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당시엔 학업보다 먹고 살 길을 찾는 게 우선이었던 터라, 명장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빵 만드는 일을 권했다.

어머니와 함께 빵집에 간 첫날, ‘에잇, 사내가 멋없게 빵이라니’하며 머쓱하기도 했지만, 어린 명장의 등 뒤에서 “저리 작고 약해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하는 사장과 공장장의 말에 제대로 한 번 해보자 싶었던 것이 인생길이 되었다.

그곳에는 명장 외에도 빵 만드는 청년들이 꽤 있었는데, 경력에 따라 만들 수 있는 빵이 달랐다. 명장처럼 신입이 할수 있는 건 반죽 비율을 맞추는 일, 다음으로 ‘식빵’ 만들기였다. 하루에 두 시간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빵 만드는 일에 청춘을 쏟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빵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이라, 손님이 기대 이상으로 많은 날에는 재료가 동이 나곤 했는데, 그날은 ‘밀크셰이크’가 부족해 당장이라도 재료를 배합해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밀크셰이크 담당 형님이 오락실에 가 있길래, 찾아가서 ‘형님 밀크셰이크가 부족해요!’ 했더니 ‘네가 만들어, 인마’하는 거예요. ‘그럼 뭘 어찌 넣으면 돼요?’ 하니 ‘설탕 350g에 분유 750g!’ 그래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그대로 만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난리가 난 거죠.”

설탕과 분유의 배합 비율이 반대로 바뀐 상황. 입문한 지 2개월 차, 혼쭐이 나고 나니 서러움이 복받쳐 그 길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정문은 붙잡히겠고, 건물 옥상과 옥상으로 뛰어넘어 도망치려고 했더니, 옥상에는 글쎄, 케이크 만드는 형님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지역색을 살려 빵을 만드는 명장
쉬는 시간에도 열중해 케이크를 만들던 그 형님을 따라, ‘케이크’ 만들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손재주는 남달랐어요. 여럿이서 만들어도 유독 잘 만들었죠. 그날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서, 케이크를 처음 만들게 됐죠.”

그 후, 점포는 확장되고, 인력은 줄면서 명장은 시간 대비 많은 양의 빵을 만들어냈다. 단기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서였을까. 스카우트될 정도로 실력이 쌓여 18살 어린 나이에 마산 유명 빵집의 ‘관리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10개월 만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죠. 처음부터 ‘빵’을 좋아해서 시작한 게 아닌데도, 슬슬 재미가 붙기 시작하더라고요. 1988년에 제대한 이후로는 더 가속도가 붙어서 기술자로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김해에 터를 잡은 건 1993년, 빵 굽는 기술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지금의 ‘김덕규’라는 이름을 걸기까지 세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소위 ‘대박’을 칠 때도 있었지만, 매출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위기에 맞서 개발한 레시피만 천여 가지, 빵집에 가야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팥빙수’를 오토바이로 배달하고, 김해 특산물(장군차, 단감, 산딸기, 블루베리, 아로니아)을 살려 ‘오감오미’ 등의 지역 과자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같은 특산품 개발로 상을 휩쓴 명장은 서울국제빵과자전 최우수상 수상은 물론 월드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서 한국인 최초 초콜릿공예부문 최우수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2012년에는 김해시민이 자랑스러워하는 경남지역 최고 장인에 선정되었다.

“김해시민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의 명장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집이 불에 타 어쩔 줄 몰랐을 때도, 김해시민들이 나서서 도움을 줄 정도였으니까요.”
 


배움과 도전으로 완성한 제과·제빵 기술
지금 명장의 베이커리에서 맛볼 수 있는 빵은 약 200여 가지다. 이제는 신선한 빵을 내놓기까지 명장의 역할은 하나다. 매일 아침, 살아 숨 쉬는 건강한 빵을 제공하고 있는가를 조목조목 살피는 일.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기본’이에요. 빵을 만들 때는 ‘먹는 사람’을 생각해야죠. 친절해야 하고, 청결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대로 된 빵을 만드는 건데, 색과 형태(볼륨감), 먹음직스러움(살아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명장은 눈대중으로도 잘 된 반죽인가 아닌가, 제대로 된 빵인가 아닌가를 단번에 알아본다. 직원들은 ‘명장님은 대충대충 만드는 것 같은데, 우리에겐 왜 이렇게 하나하나 깐깐하느냐’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 ‘감각’을 갖추고 숙련된 기술을 갖추기까지 어마어마한 배움과 노력이 쌓여야 한다는 명장.

“지금보다 한참 옛날인데, 제빵기능사 시험을 보러갔더니 딱 세 명밖에 없었어요. 대회에 도전하려고 보니, 지방에서 서울대회에 참가하는 것에 다들 엄두도 못 냈고요. 저는 정말 자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하지 않더라도 당당히 도전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술에만 매진하고 보니 배움에 목이 말랐던 때도 있었다. 터득한 기술로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대학원까지 진학했고, 그 노력은 고스란히 그의 논문(열두 가지 대체당을 활용한 제빵 적성 테스트)에 담겼다. 그가 논문을 가장 첫째로 꼽는 이유는 논문에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후 다양한 건강빵 레시피 책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그 책이 제자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앞으로 같은 길을 걷는 아들, 딸과 함께 아카데미를 운영할 계획이라는 명장. 앳된 소년의 빵과의 인연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지나온 세월을 보아하니 명장에게 제 격이었던 기술. 끝없는 도전으로 노릇 노릇 익어가는 명장의 빵 인생이 꽤나 멋스럽다.
 

 

1981 통영 칠성제과에서 제과제빵 입문
1988 기술자로 왕성하게 활동
1993 부원동 김덕규 과자점 오픈
1998 삼정동점 오픈 및 IMF 위기
2000 전국에서 매출 상위권에 랭킹
2004 대형 프랜차이즈의 등장, 양산대학(현 동원과학기술대학)시간겸임교수 발탁
2010 월드페이스트리 챔피언십 1위, 한국인 최초 베스트초콜릿상 수상
2012 경상남도 최고 장인상 수상
2016 내동본점 오픈
2019 대한민국 명장 선정
 

업데이트 2020-03-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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