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여 개의 산성(山城)과 읍성(邑城)을 쌓았던 성곽의 나라.
전투를 목적으로 쌓아 올린 산성, 행정을 위해 고을을 둘러싼 읍성은 우리 선조들의 삶과 문화가 깃든 터전이었다.
짙푸른 녹음과 태양이 대지를 감싸기 시작하는 6월, 수천 년 역사를 간직하고서 여전히 터를 지키는 우리나라 성곽에 올라본다.
험한 지형을 잇는 성곽과 방어시설의 구축,
남한산성
남한산 자락 따라 굽이굽이 천 년을 이어온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북한산성과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해 축조됐다. 성곽 길이만 11km가 넘는 산성으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쌓아 올렸다.
남한산성은 온갖 고초를 겪었음에도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몇 안 되는 산성으로, 조선의 치욕이 서린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의해 쫓기던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西門)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의식을 통해 청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땅바닥에 아홉 번 이마를 찧으며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의 신하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고하며 용서를 구하는 의식이었다.
산성도시로서 수많은 백성이 터를 지킨 세월보다 조선의 왕을 지킨 47일간의 기록으로 인해 더 알려진 남한산성은 1963년에 이르러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험한 지형을 잘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했고, 7세기부터 19세기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을 잘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남한산성 산책길은 다섯 개의 코스로 나뉜다. 남한산성 옛길까지 포함하면 모두 여섯 갈래다. 남한산 입구에서 시작해 산자락을 따라 걸어도 좋고, 차로 남한산성 행궁*까지 다다른 후 성곽길을 따라 가벼운 산책을 해도 좋다. 그 어떤 방식으로 오르든 소나무 숲길을 따라 수어장대*에 다다르면 경기도 광주와 성남은 물론 서울 동부의 풍경까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수천 년 전에 축조된 성곽에 올라 물끄러미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보는 사람들. 이곳은 역사의 현장이자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길로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남한산성 ─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23
* 행궁(行宮) ─ 행궁의 기능은 보통 셋으로 분류한다. 왕이 전란을 피해서 머무는 경우, 지방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경우, 잠시 휴양 삼아 지방으로 나들이할 경우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첫 번째 경우로 활용되었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사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로, 산성 내 최고봉인 일장산성에 위치해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1624년(인조 2)에 단층으로 축조한 것을 1751년(영조 27)에 2층 누각으로 증축하였다.
조선 시대 성곽 건축의 꽃,
수원 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가 수원 팔달산 아래 만든 조선 최초의 신도시였다. 1794년(정조 18)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여 후인 1796년에 완공했다.
화성(華城)은 ‘찬란하게 빛나는 성곽’이라는 뜻이다. 팔달산 아래 화성 행궁을 두고 위아래로 장안문과 팔달문, 양옆으로 화서문과 창룡문이 있다.
화성은 산성(山城)의 방어 기능을 갖추었음은 물론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한 읍성(邑城)이다. 당시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정약용이 설계한 것으로,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성곽 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이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한 것도 수원 화성이 처음으로,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시켜서 쌓았다. 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높낮이와 굴곡에 따라 두른 성벽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전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뒤이은 한국전쟁에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채 방치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에 이르러 5년여에 걸쳐 집중적으로 복원되었다. 이는 수원화성을 축조하던 2년 8개월간의 모든 과정, 즉 설계나 건축물의 모양, 사용된 기기, 비용 등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 축성공사에 대한 모든 ‘기록’에 관한 완벽함을 원했던 정조로 인해 복원과 재현을 이루었고, 이후 1997년에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낮과 밤 모두 아름다운 화성. 성곽을 한 바퀴 둘러 걷는 건 족히 서너 시간은 필요하지만, 역사를 알고서 걷는 길이라면 견고한 아름다움 앞에 온 마음이 뭉클해진다. 도시를 두른 성곽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창룡문 근처에 수원 시내와 화성의 야경을 한눈에 보는 열기구도 있다. 여름날이면 수원 야행(夜行)*으로도 북적이는 곳. 과거 선조들의 삶을 보듬어주었듯 화성은 여전히 너른 품을 우리에게 내어준다.
예부터 이어온 삶의 터전,
순천 낙안읍성
우리나라 읍성(邑城) 중 원형이 보존된 읍성을 꼽는다면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이다. 그중 낙안읍성은 넓은 평야에 쌓은 총 길이 1,420m, 높이 4m, 너비 3~4m의 네모형 석성(石城)으로, 1~2m 크기의 정사각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아 끊어진 곳이 없이 웅장하다.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던 조선 초기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수많은 읍성이 축조되었다. 전남지역 중에서도 특히 낙안은 평야가 많아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1397년(태조 6)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처음 토성(土城)으로 쌓았고, 1626년(인조 4) 임경업이 낙안군수로 부임했을 때 현재의 석성(石城)으로 쌓아 올린 것이 낙안읍성이다.
‘오래된 성곽 안에 여전히 사람이 산다.’는 말은 낙안읍성을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옛것을 되돌려놓은 것이 아니라 옛것 그대로다. 낙안읍성은 순천의 대표 문화재로서 토속과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숨 쉰다. 다닥다닥 붙은 초가집 사이로 사람이 살고, 남부지방 특유의 부엌, 툇마루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시대 성과 객사, 노거수인 은행나무(전남기념물 제133호) 등의 문화재가 있고, 당시 관아였던 관청 건물들이 남아있다.
서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낙안읍성에서 제일 높은 ‘빈기등’이라는 언덕을 만날 수 있는데, 낙안읍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읍성이 어떠한 형태로 이 마을을 지켜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낙안읍성에서는 골목 사이사이 초가집 마루에서 소박하게 펼쳐지는 판소리 공연 감상, 가축 먹이 주기 체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낙안읍성에는 아직도 그 경계에서 사람이 생활하고, 그 묘미로 사람들은 해마다 읍성을 찾는다.
*수원 화성 ─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 수원 문화재 야행(夜行) 프로그램(7~8월경 개최) ─ 성곽길 굽이굽이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8야(夜) 역사문화체험
*낙안읍성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쌍청루길 157-3
알아두면 좋을 역사 지식
성곽은 그 기능에 따라 도성(都城), 산성(山城), 읍성(邑城), 장성(長成) 등으로 나뉜다.
도성(都城)
왕궁이 있는 한 나라의 도읍지에 쌓은 성곽.
ex) 한양도성(서울성곽),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경주 월성 등
산성(山城)
산성은 험준한 산의 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성곽. 군사적 방어 기능이 큼.
ex) 북한산성, 남한산성, 아차산성, 창녕 화왕산성, 단양 온달산성, 보은 삼년산성 등
읍성(邑城)
지방의 행정관서가 있는 고을을 둘러싼 성곽. 조선 초기,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해안지방에 주로 축성됨.
ex)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
장성(長成)
국경의 변방에 쌓은 성곽으로 길이가 길기 때문에 장성이라고 불림.
ex) 천리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