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언제나 현장의 명장으로 남고 싶다
    대한민국 명장 '윤슬' 최옥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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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열정과 성실, 나눔의 자세로 보석세공 분야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해온 최옥남 대표를 만나보았다.
 

 

손재주가 남다르던 소년, 귀금속 세공에 발을 딛다
최옥남 대표가 2020년 명장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그의 핸드폰은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쏟아진 축하 전화와 문자 세례 덕분이었다. 그리고 한 통의 편지도 도착했다.

“‘행여 나한테 찾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라. 큰 상을 받았으니 자만하지 말고, 더 노력하고 머리를 숙여라’라는 내용의 편지였어요. 제가 17살에 처음 모셨던 스승님께서 보내오신 거였습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귀하게 보는 최옥남 명장의 삶의 궤적이 편지 한 통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최 명장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장 먼저 공구를 든 아버지가 나타난다.
바닷가 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에게 어선과 집을 짓는 목수로 살았던 아버지는 지금의 최옥남 대표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모습이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내내 미술반 특별활동으로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그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광주시에 위치한 세공 공방에 들어갔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격한 스승 밑에서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 나갔지만, 도제식으로 이루어진 세공법을 익히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공방의 막내로 삼시 세끼 밥을 했고 선배들의 빨래와 청소를 도맡았다. 한겨울 얼음물로 골목길에 앉아 빨래며 설거지를 하면서 맞은편 세탁소집 아이들이 교복을 입은 채 등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도 했다.
 

최옥남 명장이 서울에 상경한 건 1989년의 일이었다. 더 정교한 세공기법을 배우고 더 큰 길에서 걸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뛰어난 세공기술에 성실성까지 갖췄던 그는 공방 사장들에게 큰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신임은 그의 빠른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제가 모셨던 공방 사장님의 부재로 오갈 데가 없어진 제게 거래처 대표님들이 ‘우리가 거래를 계속할 테니 물건을 만들어달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제게 다이아몬드, 금덩어리를 보내주셨습니다. 엄청난 신뢰를 보여주신 거죠.”

최옥남 명장의 입가에 우물 같은 미소가 깊게 밴다.
 

스스로 찾은 동기부여의 길
최 명장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 일정한 주기로 한 단계씩 뛰어오르는 순간이 찾아왔었다고 회고했다.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었던 것, 나태해진다 싶을 때 공방을 옮겼던
것, 생각지도 못했던 공예대회의 참가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사실 예전에는 제도권 안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잘 못 느꼈어요. 혼자서 일해도 고객들이 꾸준히 찾아주셨으니까요. 그러다가 IMF가 터졌을 때 중간상인이 제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잠적해버린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거래처 대표님이 민사소송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그렇게 도움을 받은 뒤부터는 남대문지부에 가입하고 사업자도 정식으로 내면서
제도권 안에서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공예대회 참가도 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2004년도 한국귀금속공예기술경기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해 금상을 거머쥔 그는 이후 기능장을 따고 전국기능대회 등 다양한 대회에 출전하면서 스스로 실력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대회 참가는 기능인들에게 동기부여가 됩니다. 여기에 성과가 더해지면 훌쩍 성장하는 느낌이 들죠. 현장에서 일하는 자세도 달라지고요. 저는 후배들에게 대회에 나갈 것을 많이 권유합니다. 제가 전국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고 심사를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한 이후 대회에 출전하는 남대문지부 세공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굵직한 상들도 많이 휩쓸었지요. 저로서는 굉장히 보람찬 부분이었습니다.”

최 명장의 이러한 활동은 자연스럽게 귀금속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서울주얼리공예협동조합을 만들어 첨단 세공장비를 마련하고 함께 사용법을 익히면서 공유해 쓰도록 한 것이다.

이는 귀금속 세공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조합원들이 하나가 되는 초석역할을 톡톡히 했다.

경지도, 최고도 없는 노력의 산물
보석을 다루는 데는 뛰어난 세공기술이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탁월한 심미안이 필요하고 뛰어난 디자인 실력이 필요하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 또한 갖춰야 했다. 그래서일까? 최옥남 명장의 작품은 단순히 보석을 뛰어넘는 가치를 선사한다.

강강수월래를 모티브로 한 <강의 축제>,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윤슬을 제목으로 붙인 <윤슬>, 자유롭게 바람을 타고 나는 <나비의 꿈>까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랐던 소년의 꿈을 비추고, 동네 뒷산에 올라 만끽한 숲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복원해내면서 무한한 감동을 선물했다.

“보석을 만지는 일은 경지도, 최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꾸준히 노력하고 채워 성장형 곡선을 끊임없이 그려야 해요. 세공업의 환경이 부족 하긴 하지만 그걸 채우는 게 우리의 몫이고 언제까지 열악하다는 핑계 뒤에 숨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옥남 명장은 귀금속 세공인으로 살아오면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뒷면을 들춰보면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최 명장 본인이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겸손하며 자신을 낮춤으로써 끊임없이 더 나은 장인이 되고자 노력해온, 신작로(新作路)에 우뚝 선 바로 그 말이다.

“앞으로의 꿈이요? 취약계층, 소외계층, 장애인 등을 위해 제가 가진 능력을 보태고 싶습니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요. 저는 모두가 같이, 다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고객의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빛나는 추억을 위해 노력해온 그의 손끝은 지금 이 순간도 금의 품위와 다이아몬드의 우아함에 걸맞은 작품을 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명장으로서 부담에 짓눌리는 것이 아닌, 사명으로 훨훨 날고자 하는 최옥남 명장의 남은 날들이 더욱 기대되는 시간이다.

약력
2004 한국귀금속공예기술 경기대회 금상
2006 귀금속가공 기능장
2008 전국기능경기대회 귀금속공예 은메달
2010 (재)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남대문지부장(현)
2014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관련 전문위원(현)
2014~ 2018 전국기능경기대회 귀금속 공예직종 심사장
2018 제4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국가대표 선발 심사장 및 부지도위원
 

 


 

 

업데이트 2021-01-1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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