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돌 위에 세월을 새겼다. 때로는 무뚝뚝하게, 때로는 한없이 섬세하게 돌을 대하는 마음은 늘 진심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지난해 석공예 직종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며 인생에 굵은 획 하나를 남긴 연미석재 이수희 대표이사를 만났다.
돌과 함께 걸어온 일생
오직 한 길. 그의 인생에는 묵묵한 인내와 또렷한 목표, 그리고 담대한 도전이 씨줄과 날줄처럼 단단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다. 땅 위에 뿌리를 내린 듯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바위처럼 말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본다. 왜 하필 돌이었을까. 그는 ‘운명’이라는 단어로 돌과의 인연을 회상한다. 소년 시절, 무작정 상경해 발을 들인 돌공장이 시작이다. 여름에는 태양처럼 뜨겁게 달궈지고 겨울에는 얼음장 같아지는 돌을 다루는 일은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지금이야 지게차가 제 몫을 하지만 예전에는 몸집보다 큰 돌을 들어 올리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이었다. 돌이 잘려나가는 굉음이며 사방에 뽀얗게 내려앉는 돌가루는 어떻고. 뭐 하나 녹록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직업을 택하는 데 취향이며 적성을 따질 여유가 없었어요. 먹여주고 재워준다면 보수도 받지 않고 2년이고 3년이고 일하며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흔했죠. 저 역시 그랬고요. 힘은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 돌을 만난 게 저의 운명이었구나 싶어요.”
그렇게 쌓은 세월이 어느덧 48년. 돌공장의 소년은 어느덧 대한민국 명장으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평생 돌을 깨고 두드리고 갈고 닦으며 살아온 삶. 그래서 돌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다.
“아주 세밀한 현대 공구들로 만든 요즘의 작품보다 더 잘 만든 과거의 작품도 많습니다. 그때는 투박한 전통 공구 몇몇이 전부였을 텐데 말이죠. 공을 들인 만큼 결과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둔탁하고 강하지만 다듬어지면서 점차 나타나는 재료가 바로 돌입니다. 그런데 혼을 넣지 않으면 나타나지가 않아요. 조각 작품은 더욱 그렇고요. 한마디로 돌은 정직합니다.”
지극하게 갈고 닦은 실력
그의 인생은 우리나라 석공예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흥미로운 것은 시대를 읽어내는 눈이 탁월했다는 사실이다. 한창 일을 배우던 1974년, 일본으로의 수출 시장이 열리자 그는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당시에는 석등, 탑, 불상 등의 수출물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완전히 새로워진 시장에서 누군가는 제자리걸음을, 누군가는 변화의 물살을 탔다. 이수희 명장은 물론 후자의 경우. 곧장 새로운 기술을 익혀 조각 분야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때죠. 견본을 만들어 일본에서 주문 받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관리와 운영까지 배울 수 있었는데, 현재의 회사를 설립하는 기초 단계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1987년 연미석공예사를 창업, 1989년에는 법인으로 전환하여 (주)연미석재의 문을 열었다. 주말도 없이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하는 게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당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일요일과 공휴일은 일하지 않았어요. 4대보험도 하나씩 적용해가고, 퇴직금도 지급했죠. 그땐 이런 문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제가 겪은 어려움을 직원들이 반복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직원 복지에 관한 철칙은 흔들림 없이 지켜냈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다른 곳보다 훨씬 적지만 결과물만큼은 연미석재의 것이 단연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설립 3년 만인 1992년에 대통령상인 백만불 수출의탑을 수상했을 정도니, 그야말로 최고의 호시절이었다.
약력
2009 석공예기능사 자격 취득
2009 충남기능경기대회 석공예 1위
2012 전국기능경기대회 석공예 동상
2013 2013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
2013 (석조각공) 취득
2014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2016 충남기능경기대회 심사장 역임
2016 제5회 한국문화예술명인 인증
2016 대한민국우수숙련기술자 선정
2016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위촉
2019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시험
2019 석조각공 감독위원
2020 대한민국 명장(석공예 직종) 선정